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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분가분 Aug 24. 2024

교사비판 1

비판과 옹호는 깻잎 한 장 차이


이근이 형에게


저는 형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도 아니지만요. 결국 연결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어쨌든 이번 이야기는 너무나 조심스러운데, ‘교사 비판’입니다.     



  먼저, 교대생에 대한 이야기. 저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형이 얘기한 우리 동기들, 교대생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습니다. 너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형이 얘기한 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학과 행사에 참여가 낮아지자 교수님들이 앞으로 학과 행사에 불참하면 전공 수업 출결에 반영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고요? 와,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제 성격은 평소에 온화한 편이지만 말도 안 되는 것에 때로 불같이 일어날 때가 있거든요. 만약 제가 그 말을 직접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 따지고 들었을 겁니다. 학과 행사를 수업 출석에 반영하겠다니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그런 일에 대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건 저의 무심함 탓인지 기억력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형의 그다음 상황에 대한 해석과 진단에도 크게 동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발표 이후 학생들의 학과 행사 참여가 완벽에 가까웠다는 사실, 대입을 위해 오로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달리기만 했던, 프로그램 명령어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는 생각에요.

  제 기억으로 완벽에 가까운 참여율을 보인 과 행사가 뭐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빠진 사람들은 듬성듬성 있었고 게다가 특히 저희 학번 동기들은 시종일관 과 참여를 많이 하지 않았던 탓에 선배들, 심지어 후배들의 은근한 질타를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프로그램 명령어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의 모습이라기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제멋대로인 사람들도 많았고요. (일종의 ‘모범생’ 프레임인데, 교대생들은, 또는 교사들은 말 잘 듣고 착한 모범생들이어서 어쩌고 하는 등등의 말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저 너무 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부 항의 결의에, 동기 몇 명이 공개적으로 집회 날 강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에 대해서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 시절 어떤 큰 대의보다, 그렇다고 내 일신의 이익보다, 술과 자유를 쫓아 한량처럼 살았던 제가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제 동기들의 모습이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형은 저희 동기들보다 10살이나 많았고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한참 커 있던 상황에서 저희 교대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어리고 철없게 보였을 겁니다. 게다가 형은 평균적인 형 나이의 사람들보다도 더 깨어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말이 조금이나마 통했던 저에게 형은 고맙게도 여러 가지 답답함을 몇 번 토로했었지요. 그런데 전 사실 미안하게도 형의 답답함을 온전히 제 것으로 느끼지 못했답니다.

‘최첨단 개인주의적 윤리의식’이라는 형 말에 큰 틀에서 동의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지나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형과는 또 다르게 저는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을 그렇게 표현할 정도로 별로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진 못했거든요.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지만 성실히, 열심히 하는 선생님들을 보다 많이 만났습니다.




  저 또한 그렇다고 해서 교대생들의 모습이 온전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사가 될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세상일에 관심도 갖고 세상일을 자세히 들여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본 대부분의 교대생들 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야가 넓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교사는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저 제 바람일지도 모르지만요. 다들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하긴 했지만,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어떤 폭넓은 관심과 참여를 보기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탓을 모두 교대생들 개개인에게 돌리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대는 바야흐로 모든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사실상 몰락하고(이렇게나 거창한 이야기라니!) IMF 이후 나 하나 챙기기 힘든 그런 사회로 흘러버렸으니까요.      



  제가 계속 형이 비판하는 대상을 옹호하고 변명하려는 것 같은데,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형과 아이들이 열심히 심은 모를 뭉텅이로 뽑아 던져놓은 둘레 중학교 학생들의 일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둘레 선생님들의 반응과 처리는 더더욱 유감이고요. ‘선생’은 없고 ‘직업인’만 남은 현실을 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래도 ‘선생님’이라 불리는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그 뿌리는 어쭙잖게나마 더듬어 보고 싶습니다.


  형이 우리 학창 시절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말자고 하셨는데, 저는 한 번 꺼내봐야겠습니다. 일단 제가 언젠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쓴 글을 잠시 가져오겠습니다.     



1.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그랬다.


일단 남중이었고, 그래서 어둡고 칙칙했다.

건물이 길게 일자형이었던 이 학교는

정확히 절반은 중학교, 절반은 상고였다.

그러니까 복도의 한쪽 선을 넘으면

거기부턴 고등학교(그것도 소문이 안 좋았던)가 되는 거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그 앞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덩치 큰 고등학교 선도부들이었다.

다행히도, 고딩들이 우리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화장실은 전교에 달랑 한 개,

그것도 건물 밖에 있었고

소변기는 철판형이어서

오픈된 채로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철판에 물은, 나오지도 않았다.


2. 그 중학교는 그랬다.


선생들이 모두 깡패였다.

어찌나 애들을 패던지,

나 같은 모범생도(부끄럽지만, 난 모범생이었다)

허벅지에 피멍 들기가 일상이었다.

손바닥,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바닥 등

안 맞아본 곳이 없다.

싸대기? 물론 그것 또한 일상이었지.

미술 준비물 안 가져왔다고 우리는

각자의 뺨을 그들이 때리시기에 좋게 각 자리에서

비스듬히 기울여야 했고

몇 초 후 찰진 찰싹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악 선생은 떠든다고 갑자기 일렬로 쭉 서라고 하면서

도미노 블록을 엎어뜨리듯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다다다 싸대기를 날렸다.

두발 검사는 수시로 이루어졌고

머리 긴 애들은 그 자리에서 바리깡으로 고속도로가 났다.

또한, 장난치다가 걸린 애들은 앞에 나와서

남선생들의 노리개가 됐다.

고추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고,

온갖 추잡한 음담패설들이 허공에 하얗게 뿌려졌다.


3. 그 중학교는 또한 그랬다.


애들도 모두 깡패였다.

1학년 처음, 어디 초 짱과 저기 초 삼짱이 하필 우리 반이었다.

그 짱들은 기분이 안 좋으면 별일 아닌 일에도

애들을 때렸다.

온갖 주먹이 날아갔고

그 주먹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 초 삼짱이 교실 한구석에서 한 아이를

20분 정도 계속 때리고 있는데도

우린 그 일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아니, 둘 수 없었다.

어디 초 짱은 같은 반이었던

(지능이 떨어졌던, 지금으로 말하면 지적장애였던) 한 아이를

앞에 세워놓고 웃겨보라고 했다.

재미가 없거나 맘에 안 들면

빗자루로 그 아이의 손바닥을 때렸고

그 짓은 며칠간 이어졌다.

내가 그 폭력에서 다소 비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공부를 꽤 잘했기 때문이다.

(얘기하지 않았나. 나 모범생이었다고. 안다, 나 좀 재수 없다.)

그들은 여하튼, 공부 잘하는 애들은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4.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고 내 중학교가 생각나서 끄적여 봤다.

마지막 권상우의 대사처럼 대한민국 학교는 참, 좆같았다.     



  제가 1990년대 중후반에 중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이미 거의 30년 전 이야기긴 하지만, 그 당시에도 일반적인 분위기가 이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가 좀 많이 심한 편이긴 했습니다. 이즈음 이제 체벌 금지 얘기가 슬슬 나오던 시기였지요. 여하튼 아직까지는 체벌이 허용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형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기(80년대 중후반 ~ 90년대 초)는 오죽했겠으며, 그 이전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기나긴 군사독재의 포악함은 학교에도 그대로 이식되었습니다. 학교도 군대와 다름없었지요. 오와 열을 맞추어 운동장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모습은 전열을 갖춘 군인의 모습이었지요. 실제로 학교에는 교련이라는 이름의 군사학 수업이 별도로 있지 않았습니까.

  군대 문화는 학교를 야만으로 만들었습니다.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 되었지요. 그 폭력을 가장 앞장선 사람들이 어쩌면 교사들이었습니다.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친구’에 보면, 시계를 푸르고 손목 한 번 어루만진 후 최고 속도의 스매시로 싸대기를 날리는 교사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나오지요. 그 시절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아무런 이물감 없이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과장됐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런 모습은 실제로 그 시대에 흔한 것이었지요. (이런 폭력적 군대 문화의 더 오래된 기원은 사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있지요. 그들이 전체주의 문화로 우리 교육을 한 번 망쳐버렸고, 광복 이후 반성하지 않은 위정자들은 그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 교육을 또 한 번 망쳐버렸죠.)

  그 시절 ‘시스템’과 ‘제도’는 없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아무 작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적 폭력만이 난무할 뿐이었지요. 직접 때리고 밟으면서 학생들을 통제했습니다. 덕분에 통제는 잘 되었습니다. 감히 교사에게 학생이 덤빌 일은 없었지요. 교사들은 굳이 때리지 않고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고 이미 익숙해져 편하니까요.


 저는 아무리 지금의 교사가 설사 어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시절 교사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아무렇게나 써 왔고 그에 대해 진지한 반성도 없었던 그 시절 교사들을 교사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은 모두가 그랬기에 용인되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체벌을 하지 않으면서 교사 생활을 하던 분도 있을 테고, 또 체벌을 했을지언정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 있을 거라는 걸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게 용서받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폭력에 일조했던 과거에 대해 그 시절 교사들은 용서를 구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목소리를 저는 당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군사독재 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의 흐름 속에 ‘체벌 금지’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들려오자 발생합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체벌 금지’가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체벌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학교 내 체벌은 많지는 않지만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진 걸로 압니다. 2010년까지도 서울 동작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가 남학생을 심하게 폭행하는 일명 '오장풍 교사 사건'이 일어나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폭행’이 일상적이었던 건 아니었고 그즈음에서는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의 흐름과 맞물려 이미 사실상 체벌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2007년 제가 처음 기간제 교사로 교단에 섰을 때도 선생님들이 체벌을 한다는 얘기를 흔하게 듣지는 못했고(반대로 말하면 간혹 듣기도 했다는 말이겠지요.) 2013년 임용고시 장수 끝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더더군다나 체벌을 한다는 교사 이야기는 주변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공식적으로는 2011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직접적 체벌은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궤를 같이 해 ‘교사의 권위’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죠.


  이야기가 너무 길었죠? 저는 바로 이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체벌이 사라지는 바로 이 과도기적 시기 말이죠. 잠시 체벌의 옳고 그름을 따지진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동안 교사가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바로 잡고 훈육하는 방법은 ‘시스템’이 아니라 ‘체벌’이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체벌’을 통해 학생들을 통제해 왔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체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네, 맞습니다. 학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에게 맞는 사건들마저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했죠. 이른바 ‘교권 추락’ 사태가 시작된 겁니다. 교실에서 수업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는 학생들이 대다수가 된 상황은 이미 오래전입니다. 자는 학생을 깨웠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시대가 된 것이죠. 게다가 2010년대 중반부터 교사들은 ‘아동학대’의 위협에 시달립니다. 사실상 체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약간의 신체접촉, 예컨대 싸우는 두 학생을 말리려 떼어놓는 과정에서 생겨난 교사의 신체접촉에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경우마저 생기기 시작합니다. 뿐만이겠습니까. 말하려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체벌이 사라지면서 교실이 ‘무법천지가 될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벌’을 부활시키자는 것이냐? 혹은 ‘체벌’을 없앤 게 잘못됐다는 것이냐? 물론 그건 절대 아닙니다. ‘역시 애들은 맞아야 해’류의 인터넷 댓글들이 활개치고 지지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과거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체벌’이 없어진 것 자체는 저는, 우리 교육이 한 단계 나아간 측면이 있다고 분명 생각합니다. 다만 체벌이 없어진 그 빈 공간을 메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그 빈 공간을 제대로 채워놓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그럼 그 빈 공간은 누가 채워놓았어야 할까요? 당연히 교육부를 위시한 교육당국입니다. 교육제도를 바꾸고 만들 힘을 가진 그들이 해야지요. 체벌을 없애는 과정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적용할 만한 훈육 제도를 치열하게 고민하여 같이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여기에 교사들은 아무 책임이 없을까요? 교사들도 함께 대안을 만들고 제안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쪽은 학생인권을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돼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그리운 옛 시절을 생각하며 체벌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사이 어딘가 있을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대안을 치열하게 생각하는 이가 교사도, 교육 관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과는? 지금과 같은 무법, 무질서 교실의 탄생이지요. 무질서를 최소한의 질서 있는 교실로 만들려는 교사의 행동은 ‘아동학대’ 고소의 먹잇감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아무 힘이 없는 교사는 교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육을 할 수 없는 교사는 무기력합니다.

  “이제 학교에는 더 이상 진짜 ‘선생’을 찾기 힘들다”는 형의 말이 가슴에 아프게 꽂힙니다. 그러나 교사들이 그렇게 무기력해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선생질을 조금만 하려고 해도 오히려 아동학대로 몰릴 판이니 누가 무기력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형 말대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우리 교사들의 보신주의가 먼저인지 학부모들의 교사들에 대한 불신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적어도 교사에게 아무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과거 교사들은 ‘체벌’에 안주해 왔고, ‘체벌’이 사라진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메꿀지에 대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건 매한가지니깐요.

  물론 교사들이 나름의 대안을 내놓았던 들, 교육 관료들이 받아 시행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교육 당국은 작년 서이초 사건이 있기 전까지 교실 붕괴의 비참한 현실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외면해 왔고, 조금씩 개선해 오긴 했으나 크게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진 않았으니깐요. 저는 일차적으로는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벌의 시대’에는 한 번도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없는, 그 이후 세대 교사들만 애꿎게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직 본격적인 교사 비판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다음 편지에서 현장에서 제가 느꼈던 우리 교사들의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 생각입니다.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형 말처럼 ‘동료 선생님들의 이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 같아서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안에 있는 잘못을 덮고 넘어간다면 그거야말로 더 큰 상처로 남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형도 지난 편지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저 이어가 주길 부탁해요.

우리 교육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2024. 6. 7. 금요일

교사 곽 노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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