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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분가분 Aug 17. 2024

에스컬레이터 증후군

이젠 제발 '수통' 좀 바꿉시다!


노근 선생님께


얼마 전 한국 뉴스에서 나들이 나온 한 시민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때는 4월 중순입니다)      


이제 곧 있으면 더 뜨거워져 밖에 나오기 힘들 것 같아 가족과 함께 놀러 왔어요.”     


우리가 교대를 입학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기후 변화는 그저 교과서 속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기후 위기를 매년 실감하면서 살고 있어요. 4월 중순에 이미 한여름의 기운을 느끼는 한국과 달리 캐나다는 이제야 봄기운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예년보다 적게 내린 눈으로 제가 머무는 곳 둘레에 있는 호수(Dow’s lake) 수면이 낮아졌고, 일부러 오타와 강에서 강물을 끌어와 호수에 방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로에서 호수를 향해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자연의 흐름에 저항하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했어요. 언제까지 인간이 자연을 제어할 수 있을까, 잠깐 두렵기도 했지요.




더불어 지난 편지에서 선생님께서 던지신 질문이 떠올라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교사들은 과연 문제가 없는 걸까요?’

교사들은 항상 피해자의 처지일까요?’     


Dow’s lake의 호수 수면이 차오르면서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를 비롯한 부유물들이 지저분하게 둥둥 떠다니는 장면은 마치 저를 비춰주는 거울 같았습니다. 저 깊은 바닥 아래에 꼭꼭 숨기고 싶었던 모습을 만천하에 들켜버린 듯 부끄럽고 또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어요.


선생님께 드렸던 첫 편지에도 적었듯이 저는 지금 아이들에게 전하는 반성문을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성향이 만들어낸 아이들과의 관계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교사의 개별적 성향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전반적인 교직 문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집단적 우울감에 사로잡힌 선생님들의 잘못된 지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너무 섣부르기도 하고,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반성문을 쓰지 않고서는 아이들 앞에 다시 서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 저는 부족함 덩어리, 그 자체이니까요.




지금부터 전해드릴 제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먼저 밝히며, 따라서 경험론의 한계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전제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의 교사들 모습은 여기서 논외로 할게요. 그때와 지금은 시대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제는 더 이상 함부로 아이들을 혼낼 수조차 없는 비정한 세상이니까요.


아뇨, 이건 절대로 예전의 훈육 방식을 지지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역으로 교사들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동시에 지난 편지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직업 만족도 조사에서 상위 8위를 차지한 초등교사의 숨겨진 단면 속 어느 한 부분을 건드리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2015년, 읍내에 있는 1300명 규모의 큰 학교에서 근무할 때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그때는 경기도에서 충남으로 전출을 감행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텃밭 교육에 몰입했던 시절입니다. 제가 담임이었던 6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운동장 스탠드에 상자 텃논을 만들어 비록 흉내지만 손모내기를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상당 부분의 모를 뽑아 학교 건물에 던져놓았습니다. CCTV로 살펴보니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둘레 남자중학교 학생들이었어요. 중학교에 연락해 사건을 알렸고, 며칠 뒤 중학교 선생님과 관련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 몇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건 그 순간 그 자리에 모였던 어느 누구도 학생들을 혼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은 건조하게 사건의 행위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처벌 절차에 대해 말하는 게 끝이었어요.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은 졸업생이었던 중학생들의 안부를 묻는 게 다였고요. 학부모 몇 분은 도대체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불려 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안면이 있던 한 학생에게 어떻게 후배들이 정성껏 심은 모를 뽑아서 던지는 장난을 칠 수 있느냐고, 어떻게 선배가 모교에 와서 그런 행동을 재미로 할 수 있느냐고 소리 높여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서 있던 중학생들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하는 듯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게 선생님께 어떻게 전달될지 말입니다. 혁신학교를 만들면서 동료 선생님들께도 이 이야기를 했지만, 누구도 제 진심을 이해하는 분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저의 핵심은 이제 학교에는 더 이상 진짜 ‘선생’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그 옛날처럼 학생들을 때려서라도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사소한 꾸지람조차도 하지 않으려는 교사들의 모습은 딱 직업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심지어 저는 학생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어요. 도서관에서 장난인 듯 보이긴 하지만 학생이 심하게 맞고 있다는 제보를 듣고도 살피러 가지 않는 교사를 보았다고요.


함께 근무했던 어느 교감 선생님은 신규교사의 학급에서 분실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이렇게 조언하는 걸 제가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범인을 잡겠다고 괜히 심하게 아이들을 다그치면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일 수 있으니 믿음과 사랑으로 지도하세요.”

일견 지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저는 학부모 민원에 시달릴 상황을 더 걱정하는 말처럼 들려 불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은 어떻게 제 잘못을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걸까요?


아이들은 모든 게 재미고 장난이라고 말하고,

어른들은 기계적인 상벌 제도로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만 관리하고 있어요.




요컨대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교사들이 이제는 아이들의 진정한 성장을 기대하기보다는 복잡한 사안에 얽혀들지 않고 최대한 무난하게 교직에 임하려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이럴 수만 있다면 직업 만족도가 대한민국 상위 8위에나 이를 수 있겠네요!


예전 같았으면 흔히 일어났을 작은 일조차도 학교폭력이니 아동학대로 명명되고,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지니 교사들도 어떻게 하면 학부모로부터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지 족집게처럼 아는 도사가 되어버린 듯해요. 그러다 보니 교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N잡러가 되어 학교 밖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모습을 목격하곤 합니다.


도대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지기 힘들 듯, 우리 교사들의 보신주의가 먼저인지 학부모들의 교사들에 대한 불신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교육 주체의 문제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멈출 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에스컬레이터와 비슷해요. 에스컬레이터라는 기계는 자신의 몸을 아무 생각 없이 맡기기만 하면 편안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하나가 조금 더 급해서 걷기 시작하면 그 줄에 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움직이게 되지요. 결국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 이제는 편안히 서 있지 못하고 반드시 걸어 올라가거나 내려가야만 하는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됩니다. 잠깐 멈추어 되돌아보고 반성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가서 가 닿은 그곳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높은 곳과 극단적으로 낮은 곳에서 반대쪽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지금 서로 손가락질만 해대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데 학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이 에스컬레이터 증후군에 휩싸여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난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교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처음 직감한 건 교대 시절이었어요.


그 첫 번째는 새내기 때 사건입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학과 행사에 학생들 참여가 낮아지자 학과 교수님들이 이런 대책을 발표했죠. 앞으로 학과 행사에 불참하면 전공 수업 출결에 반영하겠다! 기억하시죠?

하, 그래도 대학생인데…… 고등학생 야간자율학습처럼 반강제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교수들의 발에 깜짝 놀랐고, 더 놀라웠던 건 그 발표 이후로 학생들의 학과 행사 참여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뭐랄까, 자율적으로 삶의 가치를 정립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적인 청년의 모습보다는 대입을 위해 오로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달리기만 했던, 프로그램 명령어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의 모습을 보는 듯했어요.


두 번째는 졸업반 때 사건입니다.

그해 초등교사 임용 인원을 갑자기 축소하겠다는 교육부 발표에 반발하여 전국의 교대생들이 평일에 하루를 잡아 교육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했었죠. 그래서 우리 동기들도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그날 전공 강의 교수님께도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상태였는데…… 갑자기 동기 몇 명이 집회 서너 날 전에 공개적으로 집회 날 강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혔지요.


그날 모둠 과제를 발표하는 동기들이 집회 참여로 인해 강의가 진행되지 않으면 혹시라도 자기들의 학점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반드시 강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어요. 결국 우리 동기들은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고(학생회 간부 몇 명은 참여했던 걸로 기억이 나네요), 강의는 원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마 저는 그때 직장인 친구를 찾아가 낮술을 마셨던 것 같네요.


아니, 그렇다고 그때 우리 동기들이 아주 극단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몹쓸 존재들이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지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에 관해서 이야기할 줄 아는 건강한 대학생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더욱더 혼란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맘대로 만들어낸 말이 있어요. (‘에스컬레이터 증후군’도 제가 만든 말이지만요) 교대생들은 ‘최첨단 개인주의적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 나와서 만났던 대부분의 초등교사들도 교대에서 만났던 예비교사들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물론 승진 점수와 상관없이 오로지 학생 지도와 자기 계발을 연계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교사들을 많이 만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안 사안마다 자신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침해되는 지점이 발생하면 어쩌면 그렇게도 쉽게 휘리릭 등을 돌려버릴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 후배 교사에게 이런 저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 후배 교사가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답니다.     


초등교사들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잘 참지 못합니다.”     


그 후배 말로는 자기가 다녔던 교대에서는 흔하게 교대생의 입에 오르내렸던 말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듣고 안갯속에 휩싸여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 그거였구나! 그래서 교대생들도 많은 초등교사들도 그랬던 거구나!’ 하고 모든 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은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야기했다가는 동료 선생님들 이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 같아서 그만 멈추겠습니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누워서 침 뱉기’는 충분히 했으니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초등교사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전반적인 교직 문화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번 서이초 사건을 계기로 이런 문화가 바뀌길 내심 기대하고 있기도 하고요.


2023년, 그 뜨거운 여름날 학교 현장의 불합리에 대해 수십만 명의 교사들이 모여 같은 목소리를 냈던 경험은 분명 교직 문화 혁명에 크나큰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동시에 드라마 DP 시즌1의 대사가 떠올라 미래의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하게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직사회는 군대 못지않게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바뀔 수 있잖아, 우리가 바꾸면 되잖아!"

저희 부대에 있는 수통 있잖습니까. 거기 뭐라고 적혀있는지 아십니까?

1953, 육이오 때 쓰던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부디 이제부터라도 교사들이 자신의 이익에 조금 손해가 가더라도 학교 현장의 소소한 불합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시는 모습이 늘어가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일상의 작은 ‘수통’ 바꾸기가 이어져서 전심으로 학생의 성장을 위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학교 문화로 환골탈태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참, 지난번 편지에 적었던 ‘교무업무전담사’의 충남 공식 명칭은 ‘교무행정사’였어요. 그리고 충남의 업무전담팀 운영방식은 선생님께서 경험하셨던 방식과 같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교과 전담 교사의 수업시수를 최대한 줄여줘서 업무전담팀을 이끌도록 하는 방식, 저에게는 폭탄 돌리기처럼 보이지만요. (그래서 관리자들이 업무전담팀을 이끌어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2024. 4. 27. 토요일

교사 권 이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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