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는 스스로 엄청난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산다.

2. 나의 불완전한 20대_가족

by 따스히 잔잔하게

엄마 아빠는 내가 어릴 때 자주 싸우셨다. 엄마는 감정을 모두 분출했고, 아빠는 모든 감정을 삭혔다. 싸움 한가운데서 난 공포를 느꼈다. 엄마 아빠가 싸운 뒤에 엄마가 가출하면 사랑하는 엄마가 떠나갈까 무서웠고, 남겨진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차가워진 아빠가 무서웠다. 엄마는 사랑하는 우리를 떠나 놓고서 다시 돌아와 사랑한다고, 엄마는 너뿐이라고 말하셨다. 아빠는 엄마와 싸우고 나선 차가운 태도로 돌변하지만, 엄마와 화해하면 다시 우리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엄마가 날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난 엄마의 감정들을 받아줄 수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아빠에게 한결 같은 태도로 사랑받고 싶었다. 인과를 혼동하는 나이의 나는, 칭찬을 받으면 아빠가 엄마와 화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늘 아빠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우리 가족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늘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와 대화하며 연민을 느꼈지만 엄마가 분출하는 모든 감정들을 받아주는 것이 점점 벅찼고 그런 나 스스로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와의 대화는 대부분 세상에 대한 분노(주로 정치) 혹은 엄마의 어린 시절 꿈과 좌절, 결핍 등에 대한 것, 아빠나 동생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점이 주로 다루어졌다. 주로 부정적인 내용이었고, 결론은 나쁘지 않게 끝났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며 토해내는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내는 것이 점점 힘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되기 마련이다.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포지션인 나에겐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화제를 전환하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이런 주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아빠와의 대화는 대부분 사랑 섞인 명령과 강요였다. 나는 아빠가 원했던 방향, 뜻에 부응하는 것이 점점 벅찼고, 아빠와의 대화에서 공감을 받지 못해 늘 상처받았다. 아빠는 이상적인 삶의 방향이 확고한 사람이었고, 무에서 시작해 자신이 이뤄낸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이런 아빠와 이야기하며 나는 한없이 나약하고 아빠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아빠랑 대화할 때 나는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을 해명하고 있었다. ‘요즘 입시가 정말 어렵다’, ‘요즘 취업이 워낙에 어렵다’, 이런 식으로 환경을 탓해야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는 내가 90점을 맞아가면 95점을 맞아오라고 하셨고, 95점을 받아도 100점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인턴에 어렵게 합격했을 땐 ‘이제 시작이니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고 하셨다. 아빠 앞에서 내 작은 성취들은 한없이 작은 것들이 되는 것 같았고, 나는 ‘남들 다 하는 것’들을 해내는 수준이면서 찡찡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 집엔 진정한 소통이 없었기에, 가족과의 관계에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일 수 없었다. 가족관계에서 나에게는 분명 어떤 역할이 존재했고, 집에 있는 나는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아빠의 이상향 대로 모든 것을 잘해내는 딸이 못 된다. 엄마와의 대화에서 나는 무조건적인 공감과 인내심으로 감정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게 힘들었다. 아빠에게 집에서 편히 쉬거나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죄책감이 들었고, 엄마가 찾아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느순간 집이 내게 편안한 공간이나 휴식처가 아니라, 또다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은 '회피'였다. 밖에 나가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되도록 피했다.


회피가 답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너무 힘들어 가족들 몰래 밤마다 혼자 울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날도 새벽에 침대에서 혼자 조용히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늦게까지 깨어있던 엄마에게 들켜버렸다. 엄마는 내 옆에 누워서 우는 나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작은 어깨에 무슨 짐을 그렇게 짊어지고 있기에 이렇게 힘든지 물었다. 엄마는 늘 '괜찮다'고만 하는 내가 강인한 줄만 알았다고 했다. 난 '늘 잘해내고 싶은 딸'이었지만 사실 정말 나약하고 인내심도, 공감능력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할 일을 알아서 척척해오고 힘든 내색도 안 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늘 잘 들어주는 착한 장녀가 되기 위해, 사실은 정말 애쓰고 있었다고.


단순한 고백이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당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그제서야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는 스스로 마음에 커다란 짐을 들여놓고 혼자서 계속 버텨내려 했던 거다. 엄마는 우리를 만족시키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라고 했다. 인생은 너의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적극적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져버리려고 한다. 비뚤어지겠다는 건 아니고. '인정받기 위한 나'를 보여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한 나를 조금씩은 드러내려고 한다. 나의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 가족이 진정한 소통을 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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