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속도에 맞추어

금산 보리암

by 우먼파워

아침 하늘이 붉게 번졌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태양 빛이 긴 띠를 드리우며, 부드럽고 단단하게 이어졌다. 그 빛은 오늘의 이정표 같았다. 나는 마음속 시계를 풀어놓았다. 이른 아침, 찻잔 위로 피어오르던 수증기처럼 마음에도 느슨한 여유가 일렁였다.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은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일정표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풍경에 기대고 바람을 따라 걷고 싶은 날이었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건, 더 가볍게 걸을 수 있고 그만큼 실패할 일도 적다는 뜻이었다. 그 느긋함이 오히려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했다. 가야 할 곳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 누군가의 추천도, 인터넷의 별점도 아닌, 내 마음이 향하는 곳, 그게 오늘 나의 목적지였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금산 보리암이라는 이름이 머물렀다. 산 중턱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이름에 마음이 끌렸다. 그곳에서 오래 묵힌 어떤 마음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붉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 무엇을 빌지조차 모른 채, 그저 나를 데리고 길 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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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으로 가는 산길은 예상보다 가팔랐다. 도로는 안개에 잠긴 듯 몽롱했고, 그 위로는 살얼음이 맺혀 은비늘처럼 반짝였다. 길이 점점 더 꼬불꼬불해지며 깊어지던 찰나 그 길 사이로 남쪽 바다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산바람이 폐 속 깊이 스며들자, 피로가 조금은 가셨다. 먼 산자락 너머로는 금산 정상의 실루엣이 아스라하게 드러났다.


한참을 달려 금산 보리암 입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바람이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 온몸을 휘감았고 상쾌한 공기를 깊이 들여 마시자, 마음이 다시 맑아졌다.

9시가 안 된 시간, 매표소는 문이 닫혀있었다. 뜻하지 않게 무료로 입장을 하게 되었다. 입장료는 이천 원, 둘이 합쳐 사천 원을 절약했다. 신나서 좋아하는 나를 보며


“공짜 좋아하면 이마 벗겨져요”


라며 그가 놀려댔다.


“벗겨질 때 벗겨지더라도 공짜면 무조건 좋아.”


별것 아닌 사소한 농담에도 이렇게 웃음이 터지는 아침, 그 기분이 하루를 가볍게 열어 주고 있었다.


얼마만의 산행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지금껏 산과 인접한 동네에서 살았지만 ‘등산’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내 사전에 없는 말처럼 산을 올라 본 적이 없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또 힘들다는 이유로 산은 나와 상관없는 세계라 여겨왔다. 그런데 내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마음이 환기되었다. 이처럼 여행은 언제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평소라면 외면했을 산길도, 그 순간만큼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일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일,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번 여행에서의 금산도 그랬다.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해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늘 주저하고 망설이던 내가 아니라 자신감에 가득 찬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수록 내 안의 용기도 함께 자라났다.


하지만 허리가 아픈 남편은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런 그를 보면서, 왜 저렇게 꾸물거릴까 답답해 손을 잡고 억지로 잡아끌었다. 생각해 보면 갈 곳은 단 한 곳 보리암뿐이었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고 조금 늦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평소 습관처럼 빨리빨리를 되뇌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도착이 늦는다고 보리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몸에 밴 서두름은 이성보다 강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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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골랐다. 허리도 못 펴고 올라오는 그를 보니 미안함과 짠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서서 그와 보폭을 같이 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늘 가까이 있었기에 그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말없이 곁을 지켜온 시간이 나를 어떻게 지탱해 왔는지 그 온기가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버팀목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숨 가쁜 길 위에서 서로의 속도를 맞추어 걸어주는 마음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 앞에서 모든 피로가 잦아들었다. 구름을 머금고 푸른 남해 바다와 어우러진 금산의 풍경은 그 어떤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벅찬 아름다움이었다.

여행은 이런 감동적인 순간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걸음이었다.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낯선 나와 마주하는 시간. 망설임 대신 용기를 꺼내어 보는 시간. 붉게 물든 남해의 아침처럼, 나만의 새로운 하루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쳤다. 오를수록 산세는 더욱 웅장해졌고, 길가의 바위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며 저마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자, 한려해상의 끝없는 물결이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지며 발아래로 탁 트인 바다가 열렸다. 그 위로 한 척의 배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보리암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단단히 뿌리내린 그 모습은 신비롭고도 경건한 기운이 돌았다. 그때 문득 이성계가 이곳에서 건국을 기원했다는 전설이 떠올랐다. 갈등과 번뇌 속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을지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작은 소원을 하나 품었다. 그저 이 길을 걸으며 조금 더 나다워지고 싶다는, 내 안의 목소리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드디어 금산 보리암의 품에 닿았다. 하늘과 바다, 산과 절이 한 화면에 담긴 듯한 절경에 말문이 막혔다. 힘겹게 오르느라 쌓인 피로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며, 이곳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해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듯한 감동이었다. 여행이 주는 가장 깊은 위로가, 바로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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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에서 내려다본 남해는 맑은 유리처럼 빛났다. 그 위로 산의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 한가운데,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듯 해수관음상과 삼층 석탑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찬 바닷바람에도 미동 한 점 없는 그 모습은 흔들림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듯했다. 바다를 향해 고요히 시선을 두고 선 관음상의 자태는 보리암을 찾는 이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전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가운 냉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소리보다 깊었고, 그 침묵 속엔 말보다 더 큰 믿음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들의 기도가 바람에 실려 바다와 하늘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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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굴로 발길을 옮겼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거대한 바위 품에 숨겨진 듯한 작은 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바위가 오랜 세월 은밀히 숨겨둔 비밀의 공간 같았다. 굴 사이로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오르며, 부드러운 금빛 햇살이 바위벽을 감싸안았다. 바위틈으로 스며든 빛은 어두운 굴 안을 환하게 밝히며,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황홀한 그 장면을 눈에 다 담을 수가 없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기괴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음성굴의 햇살을 남겼다.


햇살 한 줄기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 세상은 그저 평온했다. 거친 바람도, 가파른 바위도 모두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 우리 또한 다르지 않았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향해 걸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각자의 길 위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바윗길을 되돌아 올라오며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새해 인사를 나누고 눈인사와 미소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잠깐이었지만, 그 작은 교감 덕분에 이 산행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산은 늘 많은 것을 품고 나눠준다. 음성굴 앞에서 맞이한 이 순간도 바람과 바위와 사람들의 온기가 어우러진 채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여행은 늘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여행할 때면 놀라울 정도로 에너지가 폭발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점점 지쳐갔다. 통증 탓에 오래 걷지를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 이상 무리하게 끌고 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보리암의 끝자락을 뒤로한 채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 끝에서 저 멀리 펼쳐진 풍경이 자꾸만 나를 붙잡았지만, 그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어쩌면 그 마음이 다시 이곳을 찾게 할 이유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꼭 더 오래 머물며 보리암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리라. 그렇게 나의 작은 미련을 다음 여행의 기대로 남겨두었다.


여행은 끝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다시 시작을 꿈꾸게 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