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무는 논둑, 해가 지는 해변

다랭이 마을과 사촌해변

by 우먼파워

바람이 살짝 눌러놓은 논둑 위에 발을 올린 순간, 내 걸음은 저절로 느려졌다. 달려오던 속도가 차갑게 식는 듯, 숨이 가라앉았다. 숨소리와 발소리만 들리는 고요 속에 세상의 소란이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남해의 다랭이마을은 그렇게 나를 맞았다.


고갯길을 돌아 들어서자, 45도 경사에 겹겹이 쌓인 계단식 논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려 108층 680개의 다랭이논이 바다를 향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고 있었다. 바위 하나, 흙 한 줌, 돌 하나에도 세월이 묻어있는 풍경이었다. 논둑 사이로 스미는 바람은 오래전 이곳을 일군 사람들의 땀과 손길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마시며, 삶도 다랭이논의 층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 번에 높이 오를 수 없고, 반드시, 한 층 한 층 발을 딛고 나아가야만 하는 길. 그 길 위에 수많은 계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내와 기다림이 지금의 풍경을 만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에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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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바람을 마시며, 삶도 다랭이논의 층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 번에 높이 오를 수 없고, 반드시, 한 층 한 층 발을 딛고 나아가야만 하는 길. 그 길 위에 수많은 계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내와 기다림이 지금의 풍경을 만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에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온 시간이 있었다.


논 아래에서는 바다가 은빛 결을 그리며 잔잔히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파도는 멀리서부터 천천히 몰려왔다가 휘몰아치고는 부드럽게 몸을 풀며 돌아갔다. 마치 우리의 나날처럼, 거센 순간과 평온한 순간이 결국은 한 줄기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그 물결을 바라보는 동안, 나 또한 내 안의 숨을 고르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소란이 잠시 멀어지고, 시간은 파도의 리듬에 맞춰 느려졌다.


언 땅 위로 꽃잎 하나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직은 봄이라 부르기 서툰 계절이었지만, 그 작은 존재는 긴 기다림 끝에 피워낸 첫 숨결이었다.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한 계절을 온전히 견뎌냈고, 그 시간을 침묵으로 쌓아 올리며 마침내 하나의 꽃으로 피어났다. 꽃은 그저 피어있을 뿐인데 그 안에서 내 마음이 자라는 느낌이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가 보지 않아도 자기 몫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낸 그 모습이 왠지 내 삶과도 닮아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속도로 숨 쉬어야 비로소 삶도 꽃잎처럼 펼쳐진다는 것을, 그 작은 존재가 일깨워주었다.


논둑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발아래로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다랭이논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짙푸른 바다가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바다 내음과 함께 마을의 고요한 숨결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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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보니 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숫미륵’과 ‘암미륵’이라 불렀다. 숫미륵은 강인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암미륵은 만삭의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진 비바람에도 깨어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서로의 곁을 지켜온 두 바위는 마치 인생의 짝처럼 보였다.


예로부터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들이 숫미륵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면 득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내 마음을 더 붙잡은 것은 전설보다, 그 바위 곁에 쌓였을 수백 년의 기도와 한숨, 웃음과 눈물이었다. 바위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이미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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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틈으로 바다와 눈길을 건넸다. 줄기와 잎이 만든 자연의 틀 안에서 바다는 말없이 빛의 결을 바꾸며 섬들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잎사귀를 스칠 때마다 파문이 번졌고, 그 속에서 나는 고요와 생동이 공존하는 풍경을 보았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소란스레 다가오지 않는다. 오직 바라보는 이에게만 조용히 마음을 내어준다. 찬란함을 드러내기보다, 스스로를 감싸 안은 채 고요히 숨 쉬는 풍경 앞에서 나는 잠시 모든 감각을 내려놓았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품는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 순간의 고요가 내 안에도 스며들어, 나는 멈춤이 곧 가장 충만한 움직임임을 깨달았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마다 바다 냄새가 묻어왔다. 짭조름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파도의 숨결이 발끝에 닿았다. 갯바위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로 쉼 없이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며, 끝없는 리듬으로 하루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비워내는 일과 채워지는 일이 결국 하나임을 바다는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그 소리에는 말보다 깊은 위로가 담겨 있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함께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졌다. 말로는 다 닿지 않는 평온함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겨울 바다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는 숨음 힘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순간에도, 바다는 쉼 없이 숨 쉬고 있었다. 고요와 거침이 공존하는 바다처럼, 삶도 늘 그 두 결 사이를 오가며 우리를 단단하게 다듬어간다.


사촌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는 맑은 햇살이 동백나무 사이로 은빛 조각을 흩뿌렸다. 찬 바람이 모래알을 휘날리며 은빛 백사장을 쓸고 지나갔다. 거친 바람 속에서도 바다는 여전히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부서져 흩어지는 물거품은 말 못 할 사연을 들려주려는 듯, 쉬지 않고 해변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해변을 둘이 걸었다. 발끝에 닿는 차가운 모래와 귓가를 스치는 거친 바람을 느끼며 나란히 발걸음을 맞췄다.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과 몰아치는 파도가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을 금세 지워버렸지만, 함께 걷던 그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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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물들어 가는 하늘 위로 태양이 천천히 기울었다. 하루의 마지막 빛이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순간, 손 끝으로 그 빛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고 싶어 무의식중에 두 손을 모았다. 화려한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하루를 견디며 흘린 작은 땀과 숨결을 품어주는 손길 같았다. 오늘도 애썼다고, 잘 살아냈다고, 그 위로가 붉은 노을빛 속에 담겨 나를 토닥이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 위로 지나가고 말없이 바라본 붉은 해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수평선 아래로 몸을 숨겼다. 붉은 빛은 가느다란 흔적을 남기고 그마저도 파도에 쓸려 이내 사라졌다. 조용한 그 해변에 성난 바람과 잔잔한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의 속도를 따라 조금 느리게, 조금 더 깊이, 그렇게 하루를 걸어 나왔다. 해 저무는 모래사장 위로 옹실옹실 모래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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