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발지취, 여운을 품고
노량포구 동쪽, 소나무 숲 사이로 충렬사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의 시신이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되기 전, 석 달 동안 모셔졌던 곳이다.
장군의 충절은 멀리 중국 명나라까지 전해졌고, 이에 감동한 명나라 신종이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했다고 한다. 사당 안에는 그 유물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절제된 문양 하나하나에는 국경을 넘어 울려 퍼진 장군의 굳은 충심이 고요히 깃들어 있는 듯했다.
장군의 가묘를 보는 순간 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고개가 숙여졌다. 이 땅을 지키겠다는 그의 마지막 다짐이 이곳의 공기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적 속에서, 나는 장군의 발자국을 따라 마음속으로 걸었다. 끝까지 자신의 길을 지키며 묵묵히 나아간 사람. 그 흔적 속에서 삶의 속도와 용기의 의미가 조용히 내게 스며들었다. 이 고요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내 안의 마음을 가다듬고, 단단히 서 있는 법을 배웠다.
소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누군가의 거대한 발자취 앞에서 오히려 나는 내 느리고 작은 걸음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나 남과의 비교로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삶에는 가속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걸음을 늦춰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 느린 발걸음 덕분에 다음에 속도를 내야 할 순간에 힘을 모을 수 있다. 멈춰 서 숨을 고르는 시간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삶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사당 앞 바다에는 거북선 한 척이 위풍당당하게 떠 있었다. 바람도 잔잔한 바다 위, 고요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서 있는 그 배는 한 시대를 지켜낸 상징이자, 두려움 없이 맞섰던 용기의 형상이었다.
선체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의 결이 바뀌는 듯했다. 좁고 음습한 내부는 병사들의 생활과 무기, 조리 공간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수백 명의 병사들이 긴장과 피로 속에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2층에는 노와 바퀴, 포 등 발사 장치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단순한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내고자 했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한쪽 옆으로 장군이 머물던 작은 선실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좁은 그 공간에서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얼마나 많은 밤을 고뇌와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지새웠을까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거북선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말보다 더 강한 울림이 있었다.
짧지만 묵직한 질문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내 안에 숨은 대답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쫓다 보니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근처 카페에서 라떼와 쌍화차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따뜻한 차와 서비스라며 내어준 딸기 덕분에 남해의 훈훈한 인심까지 맛보게 되었다. 금새 꽁꽁 얼은 하루가 녹아내렸다.
쌍화차의 쌉싸름함이 입안에 퍼지는 찰나, 새벽녘에 꾼 꿈이 떠올랐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드는 꿈이었다. 갑자기 로또 생각이 났다. 복이 달아날까 싶어 일단 꿈 얘기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20년 만인 듯했다. 그때도 우리는 로또를 한 장씩 사서 들고는 당첨되면 무얼 할지 서로에게 물었었다. 부모님 효도 여행을 시켜드리고 형제들과 나누고 사회에 기부도 하고 싶다던 남편, 지금의 대답은 어떨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건 당첨된 후에 물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살면서 큰 행운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사는 것에 만족했고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 하나, 추첨 날까지 가슴 한편에 품고 있을 설렘, 그것이면 충분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과 한 장씩 나눠 가졌다. 당첨되면 내 은혜를 잊지 말라며 장난스레 당부도 했다. 사장님께 좋은 소식 있으면 다시 놀러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어쩌면 진짜 행운은 이런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함께 웃어줄 사람이 곁에 있고, 따뜻한 차 한 잔 앞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 조급하지 않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일. 그 소소하고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우리가 오랫동안 바라는 ‘복’일지도 모른다.
남해의 바람이 그렇듯, 삶도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스스로 다독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가만히 숨 고를 틈을 만들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오늘, 이 느린 걸음이 그 시작이길 바라며 나는 천천히 길을 걷는다.
길 위의 바람, 바다의 냄새,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를 필요도, 달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마음을 느긋하게 하고, 길 위를 한 걸음씩 걸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삶의 풍경은 빠른 발걸음 속에서가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깊이 숨 쉬는 순간에 가장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과 불행의 간격을 좁히는 일 역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