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나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불투명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세상은 적막 속에 모두 잠들어 있는데 고요하다 못해 시린 새벽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둠이 걷히는 시간, 게슴츠레한 안구 사이로 소리 없이 빛의 기척이 다가왔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던 많은 시간이 아련하게 밟혔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 여명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하얀 실루엣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성난 파도처럼 겨울바람이 무장 해제된 나를 향해 거세게 밀려들어 왔다. 날카롭고 매서웠다. 마치 투우장의 황소처럼, 바람은 온몸을 밀고 찌르며 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장기 곳곳을 헤집는 날 선 기세에 얼른 창문을 닫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가 다가왔다. 깊고 아늑한 적막 속에서 1월의 남해 새벽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천천히 하루가 열렸다.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 바다 결을 따라 달리다 보니, 노량 앞바다가 펼쳐졌다. 은은한 아침 햇살 아래,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남해대교는 마치 할아버지의 굵고 깊은 주름처럼, 세월의 품격을 품고 있었다. 그 옆에 당당히 선 노량대교는 말없이 미래를 응시하는 젊은이처럼 곧고 반듯했다. 두 다리는 서로 다르면서도 나란히 그렇게 오늘을 건너고 있었다. 찬란히 빛나는 물결 위로, 시간의 무게를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들이 겨울 아침의 상쾌함 속으로 녹아들었다. 남해의 새로운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겨울바람이 차창을 두드리며 길을 내었다. 길가에 빨강, 파랑 슬레이트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 아직도 슬레이트 집들이 있네.’
그 다채로운 지붕들을 바라보는 순간, 낡은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우리 집도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붕에 새 옷을 입혔다. 비바람에 해진 이엉을 걷어내고 새 볏짚으로 덮던 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손을 보탰다. 마당에 볏짚이 수북이 쌓이고, 지붕 위로는 바람보다 빠르게 손이 오르내렸다. 잘 다듬은 조각 작품처럼 새 옷을 입은 지붕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갈아주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바쁜 농촌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급기야 한 집 두 집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을 했다. 우리 집도 결국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그날, 동네잔치를 벌였다. 아주머니들은 음식을 장만했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 후 비 오는 날이면 슬레이트 지붕에서 협주곡 연주가 시작되었다.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음악 같았다. 그 아래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며, 숱한 계절을 함께 보냈다.
남해의 슬레이트 지붕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그 시절은 내 안에 따뜻한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여행은 그렇게 묻어둔 기억을 건드리며, 잊고 지냈던 나를 꺼내어 다시 마주 보게 했다.
바다 건너 광양제철소에서 내뿜는 떡가래 같은 흰 연기가 파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조업을 나가지 않은 정박된 배들 뒤로 반짝이는 햇살이 일렁였다. 겨울 끝자락, 남해는 이미 계절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바다와 맞닿은 시금치밭은 초록빛 기운으로 가득했다. 해풍을 맞고 자란 남해 시금치가 유난히 싱그러워 보였다.
이순신 바다공원에 들어서자, 낯설도록 고요한 기운이 감돌았다. 장군이 목숨을 바쳐 승리로 이끈 노량해전의 기억이 아직도 관음포 앞바다를 감싸는 듯 고요했다. 바다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그 흔적과 기운이 마음 깊은 곳에 스며 들었다. 그 고즈넉한 바다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간직할 만한 평온을 느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묵묵히 지켜야 할 가치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장군은 수많은 좌절과 오해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 번 낙방한 끝에 무과에 급제했고, 억울한 누명으로 백의종군하는 굴욕도 감내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다시 일어섰고 명량해전에서는 단 열두 척의 배로 삼백삼십여 척의 적을 물리쳤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싸움을 멈추지 않고, 끝내 조선을 지켰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울려 퍼진 이 말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입체영상관에서는 영화 <노량>의 명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안개 자욱한 바다 위, 결전을 준비하는 조선 수군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했고, 스크린 속 장군의 목소리는 절박하고도 숭고했다.
탄환에 쓰러지며 남긴 이 마지막 명령은 죽음을 앞둔 장군의 결단이자 승리를 지켜내려는 깊은 책임감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싸웠고, 그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장군의 단호한 의지가 스크린을 넘어 온몸으로 전해졌다.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그날의 역사가 내 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호국 광장으로 나오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노량해전의 장면을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이었다. 그 앞에는 장군의 동상이 위엄있게 서 있었다. 단단히 쥔 검과 흔들림 없는 눈빛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읭 그 자체였고, 그 앞에 서자 마음 깊숙이 묵직한 경외감이 일었다.
관음포에 서서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장군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그 바다는 이제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장군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 바다는 모든 것을 바치고 떠난 한 사람의 헌신을 깊은 울림으로 품고 있었다.
수차례의 좌절에도 장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자신의 때를 기다려 찬란한 승리를 이루어냈다. 장군의 삶이 오늘의 내게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다.
남들이 정한 속도에 맞추지 못해 초조했던 날들, 더 빨리, 더 멀리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조급하게 나를 몰아세우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남의 속도가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버티고 걸어가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걸, 이 바다 위에서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