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위에 남긴 하루

상주 은모래 비치와 미조항

by 우먼파워


여행이란, 한 장의 추억을 덮고 또 다른 장을 펼쳐가는 일이다. 떠나온 자리에 남겨진 미련은 또 다른 설렘이 되어 다음 풍경을 향해 나를 이끌었다.

은모래비치로 향하는 길, 작은 바람에도 동백잎은 온몸을 떨며 크리스마스트리의 알전구처럼 반짝였다. 싱그러운 초록빛 사이로 봄은 이미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상주 은모래비치는 금산의 절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고운 모래사장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파도는 잔잔히 해안을 덮었고, 비릿한 바람은 모래 위에 머물며 봄의 기척을 속삭였다.

해변을 바라보는 순간, ‘은모래비치’라는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빛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잔잔한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와 발끝을 간질이며 모래를 매만졌다. 해변을 걷던 사람들의 발자국은 이내 파도에 휩쓸리며 흔적을 지웠다. 그 자리를 파도에 떠밀려온 모래가 다시 덮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바다는 묵묵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파도 소리에 마음을 씻기듯,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코끝을 스치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 드넓은 수평선이 내 안으로 들어와 안겼다. 아무 말 없이도 자연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바람이 그린 모래조각과 파도가 남긴 자국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맨발에 닿는 고운 모래의 촉감이 간지럽게 전해졌다. 살랑이는 바람이 모래 결을 쓸고 지나가며, 해변은 마치 캔버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내가 남긴 발자국도 그 그림의 한 조각이 되었다 이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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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해변은 분주했다. 전지훈련 중인 운동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질주했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리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옆으론 손을 꼭 잡은 연인들이 나란히 걸으며 미소를 주고받았고,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으며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채워가는 이곳, 상주 은모래비치는 꿈결 같은 풍경 속에서 나의 일상에 작은 쉼표를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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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래성을 쌓아 올렸다. 두 손 가득 모래를 모아 꼭꼭 눌러가며 단단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쌓았다가 무너뜨리고 또 쌓았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멋진 성을 완성하는 순간, 깊숙이 밀려온 파도가 내 손끝에 머물더니 모래성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다. 허탈한 마음에 조금 더 높이 큼지막하게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 둘의 이니셜을 조심스럽게 새겨 넣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닿아도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는 소망 하나를 그 모래 위에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이 시간이, 바쁜 일상에서도 잊히지 않기를,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이 순간들이 떠올라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근처 맛집을 검색해 멸치 쌈밥집을 찾았다. 몇 해 전 통영에서 멸치회를 먹으려다 못 먹고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멸치 쌈밥 되나요? 전에 멸치가 안 잡혀서 못 먹었거든요.”


이번에는 꼭 먹어보겠다는 기대를 안고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정갈한 반찬과 함께 나온 멸치 쌈밥의 첫인상은 상상 밖이었다. 제육볶음처럼 국물 없이 접시에 담겨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눈앞에 놓인 건 아주 의외였다. 뚝배기에 국물이 담긴 채, 손가락만 한 멸치들이 자작하게 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깊은 풍미를 품은 찌개처럼 보였다. 놀라는 나를 보고 주인은, 쌈 위에 멸치를 올린 후 된장을 얹어 싸서 먹으라고 방법을 일러 주었다. 당황스러운 기색도 잠시, 낯설고 의외인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쌈을 싸기 전에 맛부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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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속에 푹 잠긴 멸치들은 오랜 시간 정성껏 끓여낸 듯 진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자 부드러운 식감과 짭조름한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진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그리고 멸치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져 예상보다 훨씬 풍부한 맛을 품고 있었다. 쌈 채소 위에 멸치를 올리고 된장을 얹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다 내음을 품은 멸치의 깊은 맛과 신선한 채소의 조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 입, 또 한 입, 자연스레 젓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냄비의 바닥이 보였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잘 차려진 정성스러운 한 끼가 마음까지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감칠맛과 포만감이 오랫동안 입안에 남았다.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채운 채, 미조항에 내리자마자 바다의 짙은 내음이 스며들었다. 비릿하면서도 청량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며, 오랜 그리움처럼 천천히 폐부 깊숙이 번졌다. 항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갈매기 떼가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흰 날개들이 바람을 가르며 곡선을 그려냈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곡선 위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은 마치 그림엽서 속 풍경 같았다. 동양의 나폴리라는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배 위에선 갓 잡아 올린 우럭을 트럭에 싣느라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퍼 올리고 나르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기쁨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어부들의 리듬을 방해할까 봐 조심스레 거리를 두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득 찬 어망과 만선의 기쁨이 전해져 왔다. 빈 트럭이 하나둘 들어올 때마다 금세 싱싱한 생선들로 가득 찼고, 채워진 트럭은 곧 다시 항구를 빠져나갔다. 그 과정은 잘 짜인 리듬처럼 반복되며 미조항은 온통 활기로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매사의 힘찬 외침과 상인들의 치열한 호가 경쟁으로 북적였을 어판장에는 이제 은은한 바다 냄새만이 감돌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여전히 갈매기떼들이 활개를 치며 어판장은 다시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방파제 위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갓 던져놓은 낚싯줄을 바라보며 묵묵히 바라보는 이, 채비를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그들 모두는 저마다의 호흡으로 시간을 낚고 있었다.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그들만의 리듬으로 바다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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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바다 위로 빨간 등대가 한가로이 서 있었다. 소란이 가라앉은 어판장의 여운을 지우듯, 바다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게 미조항의 오후는 떠들썩함과 고요함이 한 장의 풍경 속에 고르게 스며 있었다. 그 장경을 바라보는 나 또한 어느새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한적한 카페,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주인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우리가 들어서자 놀란 듯 일어섰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창가에 마주 앉았다. 라떼 두 잔이 천천히 우리의 오후를 데우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빨강, 노랑, 초록의 바람개비들이 바람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회전하고 있었지만, 그중 노랑 바람개비 하나는 삐걱대며 제대로 돌지 못했다. 에너지를 다 쏟아내며 늘 애쓰지만, 의도대로,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실망하는 그런 내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하지 않고, 바람에 제대로 실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모습이 나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갔다. 세상에 무겁게 느껴질 때도 결국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버티고 돌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찢어지고 닳아도 계속해서 움직이려 애쓰는 바람개비처럼,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버텨왔다는 걸 깨달았다.


일어설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흔들리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마음과 다시 일어서는 용기라는 것을 바람개비는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흔들리는 순간마다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바람개비를 가슴에 품은 채,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이 여행은 남해를 향해 떠났지만, 결국 나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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