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시고 조금 달콤한 우리

홍쌍리 매실 농원

by 우먼파워

꽃이 지고 난 자리에도 향기는 오래 남았다. 홍쌍리 매실 농원에 불어오는 바람에는 꽃이 없어도 여전히 이야기가 머물렀다. 사람들은 꽃이 만발한 화사한 순간만을 기억하지만, 피기 전의 시간에도 삶의 깊은 빛이 깃들어 있다. 기다림이 익어가고, 고요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안에서는 조용한 생의 숨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가면 꽃이 없을 텐데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 끌어당겼다. 매화가 피기 전의 농원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겨울의 광양, 아직 봄이 오기엔 이른 1월에, 홍쌍리 매실 농원을 찾았다. 추운 겨울 아침의 농원은 고즈넉했다. 잎을 모두 떨군 매실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었다. 인기척 하나 없는 농원엔 짙은 겨울빛만 가득했다. 입구부터 길게 줄지어 선 수백 개의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을 머금은 장독들 사이로 엄마 품처럼 포근한 온기가 퍼졌다. 그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는 고이 간직한 그리움 조각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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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 집 앞마당에도 크고 작은 장독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둥글고 투박한 항아리들 속엔 간장, 된장, 고추장이 계절을 따라 천천히 익어갔다. 봄에는 햇살이 장독대 위에 내려앉아 새 숨을 불어넣고, 여름이면 들깨 냄새 섞인 바람이 장의 숨결을 뒤섞었다. 가을에는 햇빛이 더디게 머물며 깊은 맛을 빚어냈고, 겨울이면 포근한 눈이 솜이불처럼 덮어 휴식을 선물했다. 그렇게 사계절을 건너는 바람과 햇살이 한데 어우러져, 시간의 맛이 장독 속에 고요히 익어갔다. 그것들은 우리 집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보물이었다.


아침마다 엄마는 장독대 뚜껑을 열어보며 하늘빛을 살폈고, 국자 끝으로 장을 한 번 휘저은 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퍼 올린 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한 숟갈, 간장과 참기름으로 무친 나물, 매콤한 고추장을 넣어 비벼낸 비빔밥 한 그릇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나의 최애 음식이 비빔밥인 것은, 우리 집 장맛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 맛 속에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과 엄마의 정성이 배어 있었고, 무엇보다 행복이라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있었다.


가끔 간장을 달이는 날이면 짭조름하고 진한 향이 집안 가득 퍼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을 톡 쏘던 그 냄새는 때로는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창문을 활짝 열고 곳곳에 촛불을 켜 냄새를 없앴다.

메주를 쑤는 날에는 더 바빴다. 마당 한복판에 장작불을 피우고, 큰 솥을 걸어 몇 시간이고 콩을 푹 삶았다. 잘 익은 콩은 절구에 넣어 찧었고, 그때마다 절구질 소리가 마당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콩 반죽을 꾹꾹 누르고 두들겨 네모나게 모양을 만든 뒤 지푸라기로 묶어 마루에 매달았다. 그 후 곰팡이가 균일하게 피도록 주기적으로 뒤집으며 햇빛에 내어 말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메주는 겨울이 깊어질 무렵 간장, 된장으로 익어갔다. 일 년 농사라며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장독 뚜껑을 여닫으며 오랜 시간 장맛을 들였다. 뚜껑을 열 때마다 퍼져 나오던 구수한 냄새와 짠내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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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가지 사이로 매실 움이 트고 있었다. 아직은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서 봄기운이 피어나는 중이었다. 몇 달 뒤면 온통 하얀 꽃과 분홍빛 매화로 뒤덮일 것을 생각하니,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조차 부드러워 보였다.

아침부터 서둘러 도착한 덕분에 문 열기 전의 조용한 농원을 천천히 거닐 수 있었다. 적막이 감도는 이른 시간, 농원은 숨 고르기를 하듯 고요했다. 한쪽 구석엔 개 한 마리가 나른한 자세로 앉아 지나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 같은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가꾼 땅, 청매실농원에는 시간의 결이 달랐다. 삼천 그루의 매실나무를 심고 지금도 직접 가꾼다는 홍쌍리 여사의 삶은 매실을 키운 것이 아니라 매실로 삶을 일구어낸 것이었다. 그녀가 한세월 동안 흘린 땀과 세월이 농원의 공기까지 다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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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가운데는, 햇살을 머금은 옹기 항아리들이 빼곡했다. 바람이 지나가도, 비가 내려도 묵묵히 제 속도로 익어가며 제 몫의 시간을 살아내는 항아리들 속에는 기다림이 있었고, 느림이 있었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나도 그 항아리 속 발효의 시간만큼 느려지고 싶었다. 조급함도, 성급함도 모두 내려놓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시간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숙성되어 가는 하루가 언젠가 나만의 향이 되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바람을 조용히 품었다.


TV에서 여러 번 본 장면이었지만, 막상 그 안에 서 있으니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익숙함 속의 낯설, 낯섦 속의 익숙함이 교차했다.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보다 눈에 들어온 건, 그 순간 우리 얼굴에 비친 햇살이었다. 우리는 셔터를 누르며 추억을 남긴다 믿었지만, 사실은 마음 한켠에 스며드는 감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서 변하고 있던 건 우리였다. 세상과 나 사이의 속도를 조율하며 지금의 나를 잠시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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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원 입구의 매화문화관으로 발길을 옮기니 봄 햇살 속으로 은은한 매화 향이 번졌다. 1층 전시관에는 홍쌍리 여사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정성을 들인 매실 제품들은 무엇 하나 허투루 담긴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속엔 시간과 손길, 그리고 기다림이 고요히 쌓여 있었다.


그 순간 글을 쓰는 일과 삶을 가꾸는 일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비로소 알았다. 한 문장, 한 단어를 고르고 다듬으며 마음을 들이는 글쓰기처럼, 매실도 시간과 계절, 그리고 손끝의 온기를 지나며 완성된다. 무엇을 담고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하는 과정,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제 빛과 맛을 찾아가는 모습까지 닮아 있었다.

삶도 글도 결국은 ‘익어가는 일’이었다. 조급하지 않게, 조금씩 자신의 향을 만들어가는 것은 때로 더디고 답답해 보여도, 그 느린 시간이야말로 가장 깊은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이었다. 서늘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모두 견디며 제 맛을 찾아가듯, 삶 또한 기다림 속에서 단단해졌다. 그렇게 느림의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삶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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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2층 공간에는, 매실과 사람, 시간과 정성이 서로 얽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이 곧 농원의 역사였고, 매화 한 송이, 매실 한 알마다 깃든 정성은 그 어떤 전시물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천 개의 옹기와 매화나무들이 그 이야기들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주는 듯했다.


이토록 정성스러운 공간에서 그냥 나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엑기스 한 병쯤은 기꺼이 사야지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망설임 없이 세 병을 집어 들었다. 놀란 마음에 말끝에 가시가 섞였다.


“우린 1년에 한 병도 안 먹어요”

“첫 손님인데 이 정도는 사줘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당신 늘 속이 안 좋은데 매실이 소화에 좋다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병이면 족한 것을 세 병씩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 손해 보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늘 말하던 그이지만 그 순간, 우리 부부가 걷는 속도의 차이를 느꼈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을 살피고 싶었는데, 그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과 마음을 먼저 살피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걸까?’


고작 매실 엑기스 때문에 우리가 쌓아 온 평온이 흔들렸다. 선물이 아니라 감정의 무게가 늘어난 느낌이었다. 40년을 함께 살아오며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심하게 다투지 않았는데, 오늘 이 낯선 여행지에서 언성이 높아질 뻔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마음엔 서늘한 그늘이 길게 드리웠다.


돌아오는 길, 앙상한 가지마다 내려앉은 서리가 은구슬처럼 반짝였다. 매실나무들이 가지를 뻗으며 단단히 뿌리를 내리듯, 우리도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다. 수천 번의 침묵과, 수만 번의 양보로 부부라는 이름 아래 굳건하게 뿌리내린 시간. 그 시간을 돌아보며, 나는 우리 사이에 쌓인 작은 온기와 보이지 않는 신뢰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느꼈다.


말없이 남편의 손에 든 종이봉투를 보았다. 세 병의 매실 엑기스. 그 속엔 남편의 체면, 미안함, 나를 향한 배려까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매실 향은 달콤했지만, 그날 우리 사이에 맴돌던 공기는 조금 시고, 조금 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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