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문학관
문학관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도 평온했다. 산허리를 따라 자동차가 구불구불 오르내릴 때마다, 겨울 숲이 창문을 가득 메우며 고요하고 따스한 기운이, 차 안까지 스며들었다. 목적지는 박경리 문학관. 나는 한국 문학의 거장 박경리 선생을 마주하러 가고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자,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 먼저 길을 열었다. 어릴 적 온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아 『토지』에 빠져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초가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인 평사리 마을은 시간의 속도를 잃어버린 듯 적막했고, 나는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물레방아는 느리게 돌아가고, 처마엔 옥수수와 고추가 겨울볕을 머금고 있었다. 마루 위 큼직한 호박과 흙벽에 걸린 광주리까지, 모든 사물이 기억처럼 정겹게 놓여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려다 외양간 앞에서 멈춰 섰다. 고개를 저으며 서있는 소 한 마리의 느린 몸짓에 문득 마음이 붙들렸다. 별일 아닌 듯한 그 움직임 하나에도 오래된 이야기가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세트장의 정적 속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삶이 흐르고 있는 자리였다.
그리움은 종종 냄새나 색이 아닌, 느린 리듬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브라운관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던 가족을 떠올렸다. 겨울이면 겨울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우리 집만의 풍경을 그리며 『토지』가 시작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막이 흐르고 익숙한 음악이 울려 퍼지면, 금세 조용해지던 거실. 화면 속 인물들의 고단한 삶에 빠져들며,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가슴을 졸이며, 때로는 안타까움에, 때로는 먹먹한 여운에 말없이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마음을 나눈 순간들이 쌓여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야기 그 자체보다도 그 이야기를 함께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세트장의 고요함을 지나 문학관으로 향했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작가 박경리의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박경리 문학관은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정원 한켠, 짙은 눈빛의 동상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몇 해 전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마주했던 그 전신상이었다. 같은 형상이건만 이상하게도 느낌은 달랐다. 굳은 의지뿐 아니라 한 인간의 고집과 정열이 묵묵히 깃들어 있는 듯했다.
문학관 내부는 한층 더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생전에 사용하던 재봉틀, 손때 묻은 국어사전, 빽빽하게 눌러 쓴 육필원고가 그녀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하루는 글이었고, 글은 곧 삶이었다. 벽면에 걸린 『토지』 속 인물 지도와 수많은 인물 형상도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도록 그 앞에 서 있었다.
수백 명의 인물로 엮은 거대한 서사는 결국 한 인간이 걸어온 길, 그 길 위의 고독과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야기였다. 쓰고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간 끝에 완성된 것은 단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한 생애의 발자취였다.
『토지』를 마주한 순간, 나는 단순한 작품을 넘어 한 사람의 삶 과 마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1969년 마흔셋의 나이에 집필을 시작한 박경리 선생은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지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현실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녀는 잊힌 이야기들을 세심히 끄집어내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정성껏 엮어 거대한 서사로 빚어냈다.
등장인물만 600여 명, 원고지 약 3만 1천 이백여 장에 달하는 압도적인 분량은 경이로움을 넘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벽에 걸린 친필 원고를 바라보며 그 글자들 사이에 깃든 세월을 떠올렸다. 수많은 밤과 새벽, 계절의 흐름 속에서도 묵묵히 책상 앞을 지켰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 줄 한 줄에 스민 열정과 고뇌, 그리고 사유의 깊이가 고요히 전해져왔다. 그것은 작가의 숨결이자, 한 시대를 견뎌낸 인간의 삶 그 자체였다.
평사리 들판에 겨울바람이 여전히 불었다. 나는 그 삶의 자락을 잠시나마 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손끝으로 더듬어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선생은 만족했을까.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 한 작품을 위해 인생을 내어준 세월이, 그에게 위로였을까, 아니면 고독이었을까. 역사에 남을 작품을 써낸 사람의 마음은 어떤 무게였을까.
그 질문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조용한 겨울 들판 앞에서 나는 현재의 삶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더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문학관을 떠나는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는 의미있는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