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품은 최참판댁

시간의 문턱에서 마주한 삶의 질문

by 우먼파워

흙길 위로 옛 바람이 스쳤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바람이 시간의 먼지를 걷어내자, 오래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박경리 문학관을 나서자, 최참판댁의 커다란 솟을대문이 묵직하게 서 있었다. 그 너머로 과거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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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리 주민들의 소박한 초가집과는 달리 이 집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넓은 마당을 품고 있었다. 대문을 지나자 시간의 문턱을 넘어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듯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당, 행랑채, 곳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돌계단 위의 대청마루와 지붕을 덮은 기와는 무거운 침묵으로 세월의 두께를 가늠케 했다. 건물마다 저마다의 용도와 이야기를 간직한 채, 그 시절의 숨결과 발자취를 담고 있어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 말없이 견뎌온 그 모습에서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격동의 세월과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삶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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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최서희가 세상과 맞서며 자신을 지켜냈던 공간인 별당 앞에 섰을 때는, 왠지 모를 먹먹함으로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곳은 좁고 단출한 방은 기울어 가는 가문의 운명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고단한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가족의 몰락, 시대의 격랑, 여성으로서의 고뇌까지, 그녀는 그 모든 걸 이 방 안에서 견뎌냈다. 그녀의 외로움과 결기는 기와지붕 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되어, 지금도 이 집 안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집 뒤편으로 이어진 산자락 위로 겨울 햇살이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릿발 같은 서늘함 속에도 은근한 온기가 느껴져 가슴에 몽글몽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 척박한 땅 위에서 살아낸 인물들,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숨결이 바람과 햇살, 흙 내음 속에 깃들어 평사리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벽돌과 기와, 나무 기둥 하나하나에 묻은 세월이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손끝에 전해졌다.


사랑채 마루에 서서 평사리 들판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엔 흙빛을 품고, 맑은 날엔 하늘을 담으며 강물은 늘 다른 빛깔로 흘러갔다. 나 역시 강물처럼 내 앞에 놓인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하루하루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어떤 빛과 이야기를 실어 보낼지, 어떻게 채워갈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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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더 빠른 길을 향해 나를 재촉했지만, 이곳에서 나는 서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으로 숨 가쁘게 달리던 날들을 보듬었고, 그 속에서 미처 보지 못한 나의 표정과 마음결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풍경 속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은 한순간의 감상이 아니라, 앞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갈 나침반처럼 다가왔다.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은 지, 그 대답을 찾는 과정이 곧 나의 삶이 될 것이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되짚는 일, 그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깊은 울림임을 새삼 느꼈다. 이곳에서의 느린 걸음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나의 속도, 나의 중심, 그리고 오래 묻어둔 질문들을 다시 불러내는 시간이었다.


앞으로의 삶도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멈춘 날에는, 내가 먼저 바람이 되어야 한다. 멈춰 서 있기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을 때, 바람개비는 다시 돌아간다.

결국, 바람이 불지 않는 날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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