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의 위로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갑자기 예정에 없던 곳을 불쑥 던졌다. 원래는 경상도를 떠나 전라도로 넘어가려던 참이었지만, 끌리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오케이였다. 계획보다는 마음의 끌림에, 목적지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따르기로 한 여행이었기에 노선 변경은 언제든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길 위에서 마주한 한 컷의 풍경, 한 줄의 간판, 한 마디의 제안이 새로운 여행지가 되곤 했다. 목적지는 미리 정해둔 곳이 아니라, 그 순간의 설렘이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도달할 여행지였다.
길은 언제나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섬진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달리다 도착한 곳은 하동의 화개장터였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장터를 가득 메웠고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 냄새가 피어나는 곳이었다. 6.25 전쟁의 상처와 화재의 잿더미를 견디면서도, 화개장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삶의 길목으로 다시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돌 위에 새겨진 ‘화개장터’ 라는 돌 간판이었다.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긴 듯한 그 글자들이 장터의 지난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장 안은 소란스러웠다. 호객 소리, 사투리로 뒤섞인 말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까지 활기찬 삶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동의 대표 음식인 재첩국과 참게장을 점심 메뉴로 골랐다. 줄지어 선 가게마다 ‘원조’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 지 걸음이 멈칫했다. 진짜 원조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쇼 케이스 속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과 젊은 남자의 다정한 호객 행위에 이끌려 식당으로 들어갔다.
평일임에도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맛깔스러운 밑반찬이 차려졌다. 작은 접시에 담긴 반찬 하나하나가 소박하지만 정갈했고, 젓가락이 닿을 때마다 담백한 손맛이 입 안 가득 번졌다. 곧이어 나온 재첩국은 잘 우러난 뽀얀 국물속에 섬진강의 맑은 속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한 숟갈 뜨자마자 속 깊이 스며드는 시원함이, 이곳의 겨울 바람을 마신 듯 맑고도 개운했다. 짭조름한 양념이 밴 참게장은 작은 껍질 속에 계절의 깊은 맛을 숨겨두고 있었다. 단단한 껍질을 부수자 진득한 내장이 밥 위로 스며들었다. 양념은 짠맛과 단맛, 매운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젓가락질이 멈출 틈도 없이 밥그릇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옆 테이블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남녀 열댓 명이 여행을 온 듯 시끌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이 꼭 오래된 친구들의 동창모임 같았다. 주름진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나이를 지운 채, 한순간 그 시절의 소년과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만이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그만큼 함께한 추억이 쌓이고, 그 추억들이 삶을 더 따뜻하게 채워간다는 뜻일 것이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순간들이 지금에 와서야 마음을 데우기도 한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왼쪽 가슴에 달았던 코흘리개 손수건, 운동회날 넘어져 무릎이 까지던 기억, 숙제를 안 해 손바닥을 맞던 순간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문득 들려오는 웃음소리 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한참 동안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서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이 포개어졌다. 삶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함께 밥을 나누고 함께 웃는 순간들이 이어져 만들어진다는 단순하고도 분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유월과 십일월,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초등 동창 모임은 언제나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출세를 했건, 재산이 많건 이 모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깔깔대며 놀고, 서로를 놀리며 웃는다. 그렇게 웃다 보면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음속엔 오래된 시간의 온기가 되살아난다.
추억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지금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다. 잊힌 듯 지나간 기억들이 문득 현재를 비추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시장의 활기로 버무려지고 깊은 맛으로 차려진 점심 한 끼는 여행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장터를 둘러 보았다. 어릴 적 오일장에서 보았던 약초, 대바구니, 지게 등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삶의 냄새, 투박하고 진솔한 냄새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파전에 막걸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장터 한쪽을 뜨겁게 데웠다. 그 옆에서는 녹두빈대떡이 노릇하게 부쳐져 고소한 향을 흩날렸고 옆에서는 수수부꾸미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찰보리빵, 번데기와 은행구이까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손이 먼저 가고 싶은 간식들로 가득했다. 방금 식사를 하고 나왔음에도 코끝을 스치는 냄새와 지글거리는 소리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세련되고 화려한 물건들이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소박하고 정겨운 정취로 가득했다. 시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노랫말이 실감이 날 만큼 알차고 다양했다.
쌀강정을 파는 가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도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린 뒤 한 봉지를 샀다. 덤으로 한 움큼을 더 얹어주는 아주머니의 정에 시골 인심이 두둑이 묻어왔다.
장터 한가운데서 ‘화개장터’ 노래가 울려 퍼졌다. 술잔을 기울이던 몇몇 어르신들이 흥에 겨운 듯 어깨를 들썩이며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췄다. 옛스러운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월은 분명 흘렀지만, 그들 곁엔 여전히 삶의 노래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목청을 높여 민요 한 자락을 불렀고, 옆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박자를 맞추며 화답했다. 그 소리는 장터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여행이란 풍경이나 맛만을 담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스며든 사람들의 삶과 온기를 느끼는 일, 그것이 진짜 여행의 묘미다. 어떤 지역을 알고 싶다면 무조건 그곳의 전통시장을 가라고 말할 정도로 투박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할 때마다 전통시장을 자주 찾는다. 반듯하게 정돈된 마트와는 달리 시골 장터에는 정감과 삶의 냄새가 배어있다. 그 속을 걷다 보면 나 또한 그들의 일상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기분이지만 나는 그것이 싫지 않다.
마음 한켠이 잔잔하게 일렁였던 건, 아마도 이곳에 흐르는 따뜻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우리를 다정히 품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난 화개장터는 단순한 여행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한 줄의 문장이 되었다. 바쁘게 달려오던 일상에서 잠시 멈춘 그 시간, 장터의 숨결은 자장가처럼 감미롭고 포근한 이불처럼 따뜻했다.
그동안 나는 눈에 보이는 것까지만 세상의 전부라 믿었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던 이 작은 쉼표, 화개장터는 보이지 않는 곳에도 여전히 삶이 숨 쉬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삶의 냄새,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이야기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여행은 다시 삶으로 이어지고, 삶은 다시 여행이 되었다. 잠시 멈추어 선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속도와 나읭 세상을 새롭게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