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오동도
누군가의 위로는 꼭 말로 전해지지 않아도 되었다. 때로는 햇살 한 조각, 바람 한 줄기, 바다 위에 번진 잔물결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튿날, 우리는 그 고요한 품에 이끌리듯 오동도를 향해 걸었다. 길옆으로 우뚝 솟은 빌딩 숲이 낯설 법도 했지만, 오히려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과 바다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방파제의 벽화들은 내게서 미처 꺼내지 못한 무채색의 풍경을 꺼내어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였다. 벽화를 보는 순간 불투명의 세상이 화려한 빛과 생명으로 반짝이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어제의 피로도 이유 없는 불안도 이 길 위에서는 잠시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푸른 하늘을 수놓은 구름 사이로 군무를 추듯 질서정연하게 갈매기들이 날아올랐다. 세상의 모든 평온을 간직한 듯 그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오동도 데크길에 들어서자 울창한 오동나무들이 양옆으로 길을 열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바다 위를 따라 부서졌고, 그 빛은 바람결에 실려 가지 위로, 그리고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오동도의 안쪽 깊숙이 들어서니, 아름드리나무가 만든 그늘이 온 길을 포근히 덮었다. 똑같은 자리에서 고개만 돌렸을 뿐인데 마주하는 장면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쪽은 눈이 부실 만큼 햇살 가득한 풍경이고, 다른 한쪽은 고요한 어둠에 잠긴 듯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이라도 하듯 같은 곳, 다른 장면을 연출했다.
내 삶도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쨍하게 환한 날이 있으면 어김없이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였고, 기쁨의 시간 곁에는 고단함과 슬픔이 나란히 따라왔다. 그런데도 나는 빛나는 것만 붙잡으려 애쓰며 그림자를 애써 외면해 왔다. 어둠은 실패와 상처처럼 보였고, 거기 머무르면 길을 잃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풍경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햇살이 있어야 나무의 그림자가 뚜렷해지고, 그늘이 있기에 찬란함이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그림자를 통과한 길이야말로 내 발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남을 수 있고, 그 과정을 지나야만 진짜 나다운 삶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 위에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피해 가지 않고, 내 소신대로 나답게 온전히 살아내리라 다짐했다.
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동백나무들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채, 봉오리만 살짝 부풀린 모습이었다. 햇빛에도 쉽게 열리지 않고, 바람에도 조급히 서두르지 않으며, 오직 자기만의 시간을 품은 듯 도도하게 자리를 지켰다. 붉은 꽃망울은 활짝 피지 않아도, 그 수줍음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어떤 성취와 결실을 이루어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가기 전의 기다림과 머뭇거림, 채 피어나지 못한 날들 속에도 삶은 충분히 진하고 깊었다. 한참 동안 꽃망울들을 바라보며 봄바람을 만나 붉게 터질 그날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내 발길을 숲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동백나무 외에도 후박나무, 팽나무, 돈나무 같은 다양한 나무들이 어울려 자라고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낯익은 흙냄새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잊고있던 감각들이 이 조용한 숲길에서 하나둘 깨어났다. 발걸음마다 오늘의 작은 행복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이 은은하게 빛났다.
용이 물을 마시고 갔다는 용굴로 향했다. 계단 아래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는 깊고 투명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막 피어날 듯 붉은 기운을 머금은 동백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팔손이나무 잎이 흔들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 남은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 바람을 따라 한 걸음씩 내려가자, 용굴의 기운이 서서히 전해졌다. 짙은 고요 속에 용굴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바위틈 사이로 바닷물은 쪽빛을 머금고 고요히 출렁였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바람을 품어온 깊은 힘이 느껴졌다.
정상에 닿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등대는 휴관이었다. 산꼭대기 등대에서 드넓은 여수바다를 내려다보며 수려한 장관을 담아 가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신우대 숲길에 들어서자 대나무들이 바람을 만나 악기를 연주하듯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 청아한 울림 속에 걸음을 멈추려는 찰나, 남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나, 그의 직업병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그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고적 답사를 가듯 산길을 걸으며 시대를 꿰고, 꽃을 보면 설화를 들추고, 돌을 보면 문화재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엔 대나무에서 시작해 동백꽃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동백나무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잎 사이로 아직은 앳된 동백 열매가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전망대 옆 찻집에서 마신 동백꽃 차는 은은한 향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동백의 꽃말이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을 그곳에서 알았다. 바구니에 담긴 말린 동백송이 하나를 집어 그에게 주었다.
그도 더 큰 송이를 나에게 주며 화답을 했다.
이것이 행복이지 싶었다.
포토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월의 결이 묻은 미소가 입가에 번지자, 지나온 시간이 살며시 되살아났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이 없어도 충분히 전해지는 마음,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거창한 고백이나 눈부신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의 작은 걸음 속에서, 함께견뎌온 계절의 무게 속에서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었다. 바람 거센 언덕을 함께 오르고, 낯선 길을 나란히 걸으며,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들,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동백은 연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강인했다.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제때를 기다려 붉게 피어나는 그 꽃처럼 우리 또한 서로의 삶에 오래 머물며, 때로는 단단한 벽이 되어 서로를 지탱했고, 때로는 바람막이가 되어 혹독한 계절을 견뎌냈다.
그 모든 계절을 지나 지금의 우리가 있다. 사랑이란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눈빛 하나로 마음을 알아보고, 같은 길을 묵묵히 걸으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겨울 끝에 피어나는 동백처럼, 우리의 사랑도 긴 기다림 끝에 더욱 깊고 선명한 색으로 물들었다. 행복과 불행의 간격은 어쩌면 그리 멀지 않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진짜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