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
새벽 바람은 차가웠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도시를 뒤로하고, 우리는 새털구름처럼 가볍게 향일암으로 향했다. 고요는 짙은 어둠을 간직한 채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거친 바람 소리만이 새벽의 장막을 흔들고 있었다.
새벽 5시 50분, 어둠이 길게 늘어진 시간. 아직 눈을 완전히 뜨지 않은 세상은 고요했다. 시골길은 깊은 적막 속에 잠겨 있었고, 앞차의 불빛만을 길잡이 삼아 천천히 나아갔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버스와 트럭들은 재빠르게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들을 따라가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조등을 밝히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조심스레 나아갔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 숲과 절벽이 우리를 더 깊은 골짜기로 이끌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우리만 달리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어렴풋이 자동차 불빛이 나타났다. 우리를 따라오는 듯해,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한참을 깊고 외진 길을 달려가자 산자락이 밝아오고, 향일암 마을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출 시각은 7시 35분. 하루 30개만 판매한다는 반미 샌드위치를 포장해 향일암에 오르기로 했다. 하지만 카페는 불만 켜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던 순간, SNS 정보만 믿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우리의 실수임을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 같았으면 작으마한 실수에도 서로를 탓하며 여행의 기분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실수쯤 웃어넘길 여유가 생겼다. 나이를 먹어보니, 작은 일에 화내고 짜증 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웬만한 일에 화내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이런 실수가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아, 우리가 두고두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되기도 했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하나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우리와 함께 일출을 기다리는 동지가 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시린 공기 속으로 거친 숨결이 안개처럼 부서졌다. 이백 계단까지 세다가 포기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등용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고, 오가는 사람들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컴컴한 계단 끝에서 마주한 그 문은, 시련을 견뎌낸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듯 신비롭게 빛났다. 심장을 울리는 숨결을 다잡고 문을 통과했다. 순간 바람이 달라졌다. 어둠은 여전히 짙었지만, 그 속에서 어렴풋이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곧 맞이할 찰나의 순간을 향해, 기대에 차 남은 계단을 내디뎠다.
물안개를 헤치고 오른 길 끝에서 해탈문을 만났다. 그것은 삶의 좁고 험한 고비를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출구처럼 느껴졌다. 어른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은 문은, 서로 양보하고 기다려야만 비로소 지나갈 수 있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주어진 순리를 따라야만 통과할 수 있는 문, 그 순간 나는 삶의 작은 철학 하나를 깨우치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문턱을 넘는 순간, 소란스럽던 생각들이 하나둘 옷을 벗듯 흩어졌다. 마음속엔 알 수 없는 고요와 평온이 스며들었다. 바위 사이를 지나왔을 뿐인데, 마치 세상의 무게를 내려놓은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대웅전 앞에 서니,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상징하는 법당이 묵묵히 나를 맞았다. 그 순간, 조금 전 해탈문을 지나며 느꼈던 감정이 더 깊어졌다. 내 마음이 그 문을 통과한 뒤로 이전과는 다른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처럼, 향일암은 태양을 머금은 채 묵묵히 세월을 버텨온 노승 같았다. 바위를 등에 지고 앉은 그 침묵의 기세 앞에, 나도 모르게 숨을 고르게 되었다. 고요했지만 위엄 있었고, 단단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졌다.
하늘이 서서히 색을 바꾸고 있었다. 태양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며 붉은 기운이 구름을 뚫고 바다를 물들였다. 보랏빛에서 분홍빛으로, 그리고 금빛으로 이어지는 빛의 의식 속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 황홀했다. 바다 위로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며 반짝였고, 햇살에 녹아든 파도는 빛의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대웅전 옆 계단을 오르자, 바위 동굴이 길을 내어주듯 열렸다. 그 어둠을 지나자 관음전이 절벽 끝에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발아래 끝없이 펼쳐진 남해 바다는 햇살을 머금고 은빛 비단처럼 반짝였고, 기암절벽은 그 위에서 굳건히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대웅전 뒤편 해안 절벽 탐방로를 따라 걸을수록 바람은 맑고 투명해졌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바람 한 줄기에도, 곁에 선 이의 숨결에도 세상이 조용히 흔들렸다.
향일암은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화하고, 바위와 돌을 그대로 살려 세워졌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전각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라기보다 바람과 시간, 파도가 함께 빚어낸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손댄 듯 손대지 않은 그 절묘한 조화 속에서 향일암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여행길 위에서 나는 깨달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길에서는 놓치는 것이 많았지만, 느리게 걷는 길 위에서는 마음이 더 많이 보였다. 잠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멈추고 바라보고 스며드는 그 과정 속에서 진짜 여행의 의미가 있었다. 행복은 숨은 그림을 찾듯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하루에 충실할 때 삶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향일암이 내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지금껏 나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용기 없고 상처투성이며 나약한 나이지만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충분하다고 마음속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마음의 싸움이 멈췄다. 그리고 알았다. 삶의 아름다움은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피어난다는 것을.
그 깨달음 하나로, 오늘의 여행은 충분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