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느와 마가렛 전시관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은 고요했지만,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어제 본 수탄장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새 잠을 설쳤다. 어둠 속에서 되뇌던 기억들은 찬 공기와 뒤엉켜 내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사춘기 소녀처럼 바람 한 줄기에도 울컥해질 것 같은 날이었다. 이렇게 가볍지 않은 마음을 안고, 소록대교를 건넜다.
한때 외딴섬이었던 소록도는 이제 다리 하나로 세상과 연결되었지만, 그 섬이 품고 있는 시간과 사연은 여전히 닿기 어려운 깊이에 머물러 있었다. 섬을 향하는 동안, 다리 아래로 흐르는 바다마저 역사를 증언하는 듯 짙고 푸르렀다.
소록도박물관에 가기 전 먼저 마리안느와 마가렛 전시관을 방문했다. 소록도를 이야기할 때 이 두 분을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가장 먼저 그들의 흔적부터 만나보고 싶었다. 평생 타인을 위해 헌신한 두 간호사, 그것도 먼 타국에서 묵묵히 실천한 숭고한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들이 걸어온 길 앞에 섰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1960년대 초, 바다를 건너 이국의 땅에 발을 내디딘 두 명의 젊은 간호사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된 환자들, 턱없이 부족한 의약품, 형편없는 의료시설, 이런 차별과 고립의 상처 속에 살아가던 이들에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누구도 돌보려 하지 않던 그곳에서, 낮에는 진료를 돕고, 밤이면 상처를 닦고 붕대를 갈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환자들에게 직접 음식을 먹여 주며 상처를 씻기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였고, 두려움보다 사랑이 앞섰다.
전시관 한편에 있는 두 사람의 손도장 조형물 앞에 서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절망 속에 위로를 건넨 그 손, 거룩하다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할 무언가가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4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가혹한 편견과 고립 속에서 신음하던 이들에게 그들은 단순한 간호사라기보다, 어머니였고, 가족이었으며, 살아갈 희망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들도 나이를 먹었다.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 환자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2005년, 조용히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남긴 건 단 한 장의 편지뿐이었다.
그 짧은 한 줄에 담긴 겸손과 존엄이 나를 오래 붙들었다. 평생을 바치고도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 앞에 코끝이 시큰해진 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두 사람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소외되고 잊혀졌던 땅 위에, 그들의 이름이 다시 불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전해졌던 온기는 아직도 소록도의 바람을 데우고 있었다. 차가운 파도에 스민 체온처럼, 그 따뜻함은 섬을 찾는 이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잔잔히 퍼져갔다.
바랜 사진 속에서도 환한 미소는 빛났고, 허름한 간호복에서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이 묻어났다. 두 사람의 손때 묻은 의료 도구를 보며, 이 작고 소박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무서운 전염병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뭉클한 마음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처녀의 몸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보여주었다.
입구 한쪽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도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내어 마음을 전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떠난 지 오래지만,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소록도의 바람 속에, 파도 속에,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이라는 걸, 나는 그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 마음이 이 섬을 지나, 바다를 건너, 오늘의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제 소록도는 아픔의 땅이 아니라, 사랑이 머문 자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돌아보면 그동안의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유명한 명소를 찾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달랐다. 역사의 한켠에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우리가 쉽게 외면해온 자리, 잊어서는 안 될 곳에 마음을 두었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니, 비로소 아픈 역사도, 다른 이들의 상처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상처를 직시하는 용기,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기억하는 일, 바로 그것이 이번 여행이 내게 안겨준 또 하나의 치유임을 소록도의 바람은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