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때로 특별한 이벤트나 화려한 선물보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깊이 자리 잡곤 한다. 얼굴을 마주 보며 건네는 따뜻한 눈길, 손을 잡고 걸으며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 이러한 작은 순간들이 모여 마음 깊은 것에 사랑의 흔적을 남긴다.
그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날, 그는 내게 자전거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자전거를 빌려 놓을 테니 하숙집 근처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샌드위치와 과일을 간단히 챙겨 약속 장소로 갔다. 목적지는 대청댐이었다. 하숙집에서 대청댐까지는 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나게 나아갔지만, 가도 가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고 점점 지쳐갔다. 평평한 길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비탈길도 오르고 내리막길도 가야 하는 힘든 여행이었다.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던 중 트럭에 탄 군인들을 만났다. 수십명의 군인들이 이동 중이었는데, 그들의 표정에는 뽀얀 먼지같은 고단함이 배어있었다. 힘겹게 페달을 밟느라 누렇게 익어가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을까? 갑자기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쌍시옷의 욕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끈적끈적해서 절대 떨어질 것 같지않은 쌍욕을 나는 폭우처럼 고스란히 뒤집어 써버렸다. ‘나한테 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큰 충격에 가쁜 숨만 몰아쉬었고, 그는 나를 다독이느라 바빴다. 힘들고 지치고 욕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우리의 자전거 여행은 장장 4시간 만에 끝이 났다.
한 번은 전라북도 진안에 있는 마이산에 놀러 갔다. 하숙하던 그를 위해 내가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엄마가 양념해 주신 돼지 고추장 불고기와 김치, 상추, 불판과 부르스타 그리고 돗자리 까지 챙겼다. 제법 묵직한 짐을 가지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서너 시간을 달려 드디어 마이산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이미 점심때가 되었고 우리는 점심부터 먹기로 하였다. 평평한 자리를 찾아 돗자리를 펴고 고기를 구웠다. 배고팠던 우리는 허겁지겁 고기 두 근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고기는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게 익었고,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는 입맛을 더욱 돋웠다. 첫 입에 입안 가득 퍼지는 매콤한 고추장 양념과, 부드럽게 구워진 돼지고기의 풍미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고기 한 점을 씹을 때마다 양념이 고기 속 깊숙이 스며들어 풍부한 맛을 선사했고, 상추에 싸서 한 입에 넣으면 매콤하고 감칠맛 나는 양념이 입 안에서 폭발했다. 그 맛은 그동안 먹어본 제육볶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고 강렬했다. 매운맛과 감칠맛, 그리고 불향이 어우러져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입안에서 즐거운 축제를 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제육볶음의 매콤한 여운이 입안에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암마이봉을 오르기로 했다. 암마이봉은 마이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경사가 있지만 초보자도 오를 수 있을 만큼 무난한 산이었다.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낮게 기울어지면서 마이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마치 금빛 물감을 흘려놓은 듯, 숲 속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며 기분이 상쾌해졌고, 우리는 다시금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이산의 풍경에 빠져들며 한껏 여유를 즐기다가, 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산을 서둘렀다. 한참을 내려온 후에야, 문득 돌탑을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풍경과 여행의 즐거움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중요한 명소를 놓쳤다는 것이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여행이 끝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지만, 그 순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그 자체로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돌탑을 놓친 것도, 그날의 풍경도 결국 우리의 이야기에 작은 에피소드로 남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