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부자가 된 아빠의 슬기로운 퇴직생활
아빠한테 남동생이 하나 있다. 작은 아빠는 세상 잡기에 두루 능하신 분이다. 트럼프 카드, 화투, 마작 등은 기본이고 바둑도 두고 노래도 하고 술 담배도 즐기신다. 아빠는 언제나 “공부만 나보다 좀 못했지, 다른 건 못하는 게 없지”하고 동생을 자랑스러워한다.
반면 아빠는 취미가 별로 없다. 대신 대학 시절엔 장발에 통기타를 쳤고, 골초에 말술이랬다. 불교 지식에도 통달했다. 불심을 마구 토해낸 덕분에 전도하러 온 사람이 “악귀야 물러가라!”고 일갈했단다. 세월이 사람을 많이 바꾼다. 지금 아빠는 폐가 깨끗하고 와인이나 가끔 한 두 잔 하는 장로님이다.
그나마 아빠의 취미를 꼽자면 뜸과 침, 낚시와 독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소화기가 약한 아빠는 이십 몇 년 전쯤 뜸과 침에 입문했다. 엄지손가락만한 은색 침구를 갖고 다니면서 속이 더부룩하면 손에 침을 놨다. 집에 쑥뜸을 잔뜩 사놓고 뜸도 했다. 현관을 열면 너구리굴처럼 집안에 뜸연기가 자욱했다. 손바닥은 하도 지압을 해서 지금도 꼭 골프인 마냥 한가운데 굳은살이 배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주말에 낚시터에 자주 따라 갔다. 그래도 그 저수지 특유의 물비린내 흙냄새는 싫었다. 아빠가 붕어랑 미꾸라지를 몇 마리 잡은 날 집에 가져와서 대야 같은 데 넣어놓았는데, 성질 급한 물고기들이 하룻밤을 못 참고 탈출하겠다고 다 튀어나왔다. 다음날 아침 그 많은 빠삐용들을 본 엄마는 아연실색했다. 그 이후로 우리 집에 관상 목적의 어류가 거주한 적은 없다.
퇴직 이후에 재밌게 지내려면 친구랑 취미가 있어야 한댔다. 나는 아빠를 걱정했다. 아빠는 40년 지기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그 친구는 멀리 산다. 오래 본 친구라고 그렇게 잘 맞는 것도 아니다. 아빠는 가족들이 호응하지 않아서 낚시를 안 간지 한참 됐고, 독서는 너무 정적인 취미다. 나는 퇴직한 아빠가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면 어떡하지, 종종 생각했다.
기우였다. 아빠는 퇴직 3주 뒤부터 제빵을 시작했다. 어느 날 마트에서 밀가루랑 이스트를 사더니 집에 있는 계란이랑 설탕을 가져다가 빵을 만들겠다고 했다. 아빠는 계란프라이랑 라면은 할 줄 알지만 다른 요리는 못한다. (김치볶음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지난 20년간 먹어본 적이 없다.) 요리엔 젬병인 사람이 제빵을 한다고 하니 식구들은 비웃었다. 그냥 몇 번 해보고, 잘 안되면 그만 두겠거니 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빠는 첫날부터 성공했다. 첫 빵은 빵틀이 없어 심지어 손잡이 없는 프라이팬에 구웠는데, 매우 먹을 만 했다. 그 뒤로도 만드는 족족 맛있었다. 아빠는 도서관에서 빌린 ‘쉽게 만드는 아침빵’ 이라는 일본 책을 보고 따라했다. 참깨빵, 꽈배기빵, 후추빵, 쿠페빵, 포카치아, 치아바타가 줄줄이 집 오븐에서 나왔다. 주방에 거의 서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빵을 이렇게 만들다니. 주방에 오래 있어야 요리도 잘한다고 믿는 내 신념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자세히 관찰하니 아빠는 정말 책에서 하란 대로 그대로 했다. 10시간 발효를 시키라면 타이머를 맞춰놓고 10시간을 기다렸다. 계량은 당연히 칼같이 했다. 오렌지필을 넣으라면 쿠팡에서 오렌지필을 사서 넣고, 1g이 들어가더라도 바닐라에센스를 반드시 사서 넣었다. 엄마랑 나는 “오렌지필 같은 건 없으면 안 넣어도 돼” “아 무슨 바닐라에센스를 한 방울 넣자고 사는 거야” 라며 잔소리했지만, 뚝심의 제빵사는 엄마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먹음직스런 빵을 구워냈다.
아빠는 난이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당신이 내키는 대로 구웠다. 스콘을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면서 스콘만 몇 판을 구웠고, 통밀빵이 건강에 좋다면서 통밀 함량을 계속 바꿔가며 몇 덩이를 만들었다. (그때는 괴로웠다.) 어느 날은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를 듬뿍 넣어 치즈케이크를 구웠고, 커스터드가 묵직한 에그타르트도 한 판 만들었다. 나는 아빠가 실패하면 제빵에 흥미를 잃을까봐 “그런 건 어려워서 초보가 못한다”고 말렸다. 그런데 아빠는 거의 성공했다. 주위 사람들에겐 케이크 상자까지 사서 치즈케이크를 선물했고, 에그타르트를 잔뜩 만들어 딸집에 가져왔다. 손주 돌에는 생애 첫 당근케이크를 만들어줬다. 친구 집에 놀러간다는 손주를 위해 초콜릿과 호두를 듬뿍 넣은 초콜릿 쿠키를 세 판 구웠다.
아빠는 최근 천연 효모종에 도전했다. 때 되면 밥 주고 잘 크나 살피고, 생각보다 덜 부풀면 상심한다. 아빠가 어릴 때 마당 있는 집에서 키웠다는 백구인지 황구인지, 그 강아지를 제외하면 50여년 만에 나타난 아빠의 반려미생물이다.
아빠는 홍삼맨이어서 근 10년 간 모든 생일과 어버이날 선물 1순위가 홍삼이었다. 올해는 제빵사를 위해 반죽기를 드렸다. 아빠는 팔 아파서 반죽이 어려웠는데 이제 편하게 하겠다면서 좋아했지만, 막상 써보니 손으로 하는 게 역시 섬세하다고 말해 나를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다음 프로젝트로 유튜브를 노린다. 몇 천 만 뷰가 나오는 동영상에는 규칙이 있다면서, 레시피를 찾다 찾다 이제는 당신이 그 규칙을 꿰뚫었다고 한다. 아빠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촬영하고 편집할지, 이미 상당한 그림이 있을 것이다. 아빠는 이제 예순다섯, 하고픈 일이 많은 아빠가 참 멋있다.
<a href="https://pixabay.com/ko/?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3116378">Pixabay</a>로부터 입수된 <a href="https://pixabay.com/ko/users/congerdesign-509903/?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3116378">congerdesign</a>님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