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달라지는 관계에 대하여
사촌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우리는 친해질 겨를이 없었다. 친하지 않은 것 치고는 사진은 많이 찍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나의 친할머니는 장사가 잘 된 날엔 손주 4명에게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 입히기 좋아했다. 그 덕에 고만고만한 어린애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쑥스럽게 웃는 사진이 남았다.
나는 큰 고모의 둘째 딸과는 10개월, 작은 아빠의 첫째 딸과는 10개월 차이가 났다. 2월생인 나는 고모의 딸과는 같은 학년, 작은 아빠의 딸보다는 한 학년 위였다. 엄연히 윗 학년이니 어른들은 그 애더러 날 언니라 부르라고 종용했는데, 그 애는 사춘기에 “똑같이 10개월 차인데 왜 나만 언니라고 부르냐”고 반항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학년이 항상 이긴다. 그 반항은 금방 소리 없는 메아리로 수그러들었다.
우리는 십대 초반에 한번, 이십대 초반에 한번 만났다. 이십대 초반에 만났을 때 그녀는 밝은 갈색 머리에, 이미 운전경력이 5년도 넘는 베테랑 드라이버였다. 내 기준엔 엄청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에 딱 붙는 끈 나시를 입었는데, 대학교에 가서도 범생이였던 나는 속옷 끈이 그대로 보이는 게 너무 어색해서 자꾸 동생의 속옷 끈을 올려주었다. 친구들과 클럽에서 밤늦게까지 어울리는 동생은 나보다 훨씬 어른 같았다.
이십대 중반에 우리가 한국에서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언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름 회심의 서울 관광코스를 짰는데, 깊은 인상을 심어주진 못했다.
나는 삼십대 초반의 신생아 엄마가 되어 다시 미국에 갔다. 우리는 의외의 절친이 되었다. 결혼을 앞둔 그녀는 나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고, 외국에 나와 말할 사람이 없는 나는 그녀에게 자주 의지했다. 졸지에 전업맘이 됐다가, 뜻밖에 경단녀가 됐던 나는 마음에 화가 많았다. 아이를 안고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면서 그녀와 통화하면 응어리가 제법 풀어졌다. 당시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을 나의 결혼생활과 육아의 어려움 등등을 그녀는 참을성 있게 잘 들었고, 대륙을 가로질러 우리 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그녀는 추진력이 대단했고, 놀랄 정도로 바지런했다. 그 집의 모든 여행 일정은 그녀가 짰고, 뭔가를 물으면 항상 제 일처럼 알아보고 초고속 답변을 줬다. 내가 CEO라면 저런 직원과 일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이듬해 겨울에 결혼했다. 바닷가가 보이는 멋진 야외식장이었다. 집안의 첫 손주였던 내 아들이 화동으로 반지를 전달했다.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가 짧은 버진로드를 걸어가 신랑 신부에게 반지를 전달하는 미션에 성공했다. 모두가 “와아” 하고 박수를 쳤다.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동생 덕에 나는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튜브톱 드레스를 입고 들러리를 섰다.
동생은 작은 아빠를 닮아 술을 무척 잘 마셨다. 알콜을 잘 분해하는 DNA를 물려받아, 숙취를 몰랐다. 위스키 와인 맥주 소주를 마구 섞어 마시고 진탕 취해도 그 다음날이면 술을 안 마신 날이랑 똑같이 산뜻하게 나타났다. 반면 가엾은 나의 제부에겐 그런 DNA가 없었다. 둘이 같이 술을 마셔도 제부만 술병이 나서 종일 침대 신세를 졌다.
그녀는 모든 주종을 고루 사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와인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아이를 갖게 된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을 때 와인을 한 두 모금 마셨다. 워킹맘인 그녀는 모성애가 굉장해서, 평균보다 오랜 기간 아이에게 수유를 했다. 아이가 자라 수유텀이 좀 길어졌을 땐 아이를 재우고 와인을 한 두 잔씩 하면서 한국드라마를 봤다. 그녀는 코로나19 시기에 재택을 하면서 아이를 열심히 키웠고, 그 동안 이직도 하고 이사도 하고 가족 병간호도 했다.
그녀와 나는 “요새 드라마 뭐 봐?”로 주로 대화를 시작하고, 그 이후엔 서로의 아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얘기한다. 가끔은 남편 이야기를 하고 회사 일과 가족 건강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나의 지인 중 가장 멀리 있지만 나의 근황을 가장 자세히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와 가장 멀리 있는 나도, 그녀의 근황을 제법 속속들이 알고 있다.
1%의 비난도 없이 100% 지지만 받고 싶은 날, 나는 태평양 건너 있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밤낮이 바뀐 바닷가 도시에서,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과 함께 그녀의 답장이 오면, 이 세계에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녀가 마음이 힘든 날에는 먼 도시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떠올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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