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을 붙들어준, 청춘의 취미
동생은 자주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두상이다. 얼굴이 좁으면서 길고, 뒤통수가 동그랗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잔꾀가 많고 눈치가 빨랐다. 엄마는 오래 할 운동을 찾아주려고 이것저것 시켰다. 동네 아이들이랑 같이 태권도도 다니게 하고, 수영을 가르쳤다. 동생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웠고 나중엔 검도도 했다. 그 모든 것은 단기로 끝났는데, 이유는 대체로 간단했다. 태권도는 지루하고, 수영은 힘들었다.
검도가 조금 특이했다. 검도를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머리를 보호하는 호구 때문이었다. 호구를 쓰고 움직이면 땀이 나서 얼굴이랑 머리가 간지러운데, 호구 안에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아 볼펜을 집어넣어 긁어야 하는 게 너무 싫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는 검도도 그만두었다.
사춘기의 그는 게임에 매진했다. 키 크려고 우유를 1리터씩 마시며 농구를 했다는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크지 않은 것은 모두 게임 때문이다. 게임을 하느라 밤에 늦게 자서 성장 호르몬이 안 나왔다는 거다. 모두가 게임의 중독성과 폭력성을 주장할 때 그는 게임을 하면 잠을 안자서 키가 안 큰다며 게임의 해악을 부르짖었다.
수년간 여러 운동과 게임을 섭렵한 그가 정착한 곳은 야구 경기 관람이었다. 스포츠 깨나 보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야구의 본고장 미국 야구를 시청했다.
그가 국내 굴지의 재수학원에서 공부할 때, 편편히 놀던 대학생 시절에, 집에 오면 항상 야구 중계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있었다. 그는 이걸 보면 귀가 트이므로, 이것은 영어공부라고 주장했는데, 그건 반쯤은 맞는 말이었다. 동생은 회화만은 유창했다. 그는 지금은 상당히 유명해진 NGO와 부모님 집 근처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일 안하는 날은 역시 책상위에 다리를 척 올리고 컴퓨터 모니터로 야구를 봤다.
나는 야구 룰을 대강만 알았다. 서당개보다 못한 실력이라, 아무리 어깨너머 풍월을 들어도귀가 트이진 않았다. 다만 중계에서는 언제나 높은 도나 레를 오가는 해설자의 열정이 느껴졌다.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지지부진한 경기에서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분수령이 있었다. 그 타이밍이 되면 해설자와 중계자는 높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고, 그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쭉쭉 뻗는 타구가 담장을, 담장을, 넘어, 갑니다” “세인트루이스가 이번 원정 경기를 이깁니다!” 기타 등등.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만 들어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몇 번쯤 동생의 생일 선물로 야구 모자를 선물해주었다.
동생이 경기를 열심히 보는 데 머물지 않고, 야구 커뮤니티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글씨를 쓰기 싫다며 타자를 쳐서 일기장에 붙였던 인물이다. 그가 글을 쓰다니. 놀랐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이 팀이 이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는 둥,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주목할 만한 관전 포인트는 무엇이라는 둥 나름의 고견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야구를 예전만큼 자주 보지 않는다. 그의 플레이리스트엔 조카가 좋아하는 까이유와 콩순이가 추가됐다. 모자도 부러 덜 쓴다. 머리에 바람이 잘 통해야 두피가 숨을 쉬어 머리카락이 덜 빠지기 때문이다.
국내 탈모시장 규모는 4조, 탈모인구는 1000만명으로 추정한단다. 그럴 리가 있나. 어렸을 때부터 머리숱이 많아 고민이었던 사람들 빼고는 대한민국 인구의 대부분이 탈모를 걱정한다. 그는 탈모인구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고, 다행히 코스트코에서 판매하는 탈모치료제와 꾸준한 관리(aka. 야구 모자 덜 쓰기)로 탈모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데 성공한 듯하다.
다음 동생의 생일에는 구멍이 많이 뚫린 통풍 잘되는 야구 모자를 골라 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