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원효대사님 말씀
남편은 일 년 내내 ‘뜨아’파다. 한여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은 손에 꼽는다.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섞다니, 커피 양이 적어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란다. 그는 커피 상품권을 정기적으로 구매하고, 가끔은 1+1 쿠폰이 오늘까지라며 뛰어가서 아무도 안 시킬 것 같은 시즌 음료(aka. 이상한 과일 슬러시)등을 사왔다. 1년에 커피 값을 얼마나 썼는지를 신이 나서 계산하기도 하고, 스타벅스의 굿즈를 종류별로 줄서서 받아온다.
많은 커피 애호가가 그렇듯 그는 아침에 출근해서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늦은 오후나 저녁에 또 한 잔을 마신다. 자기 직전 베란다 의자에 앉아 네이버 스포츠 뉴스를 검색하며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게 그의 낙 중 하나다.
그는 본인이 카페인에 내성이 생겼다고 믿었다. 카페인을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지만, 술 담배를 안 하는 사람에게 커피까지 마시지 말라는 건 가혹했다. 몇 달에 한 번씩만 “하루에 두 잔만 마셔라”고 근엄하게 충고했다.
어느 날 그가 응급실에 제 발로 걸어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저녁이었다. 응당 퇴근했어야 하는 그는 오지 않고 “퇴근길에 병원을 들르겠다”고 전화를 했다. 퇴근길에 갑자기 숨이 가쁘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어지럽기까지 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는 거다. 그는 장수집안 출신이다. 나는 그의 심장이 튼튼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으나,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에 갔다.
창백하게 질린 그는 코로나 시국의 응급실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4시간을 대기하며 엑스레이 피검사 심전도검사를 한 결과 그는 전신이 튼튼하다는 소견을 받아들었다. 의심했던 역류성 식도염마저도 딱히 증상이 일치하지 않았다. 조금은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 이후 그는 명확한 병명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한 달여에 걸쳐 또 각종 검사를 했다. 그는 반쯤은 실망스럽고, 반쯤은 다행스럽게도 역시 전신이 튼튼하다는 전문가의 재확인을 받았다. 그리고 각종 검사를 거치다 발견한 작은 용종을 떼어내는 시술도 받아 한층 건강해졌다.
그의 증상의 원인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원인을 찾은 것 같다며 비밀스럽게 뭔가를 털어놨다. 그가 지목한 범인은 커피였다. 증상이 나타난 날에 섭취한 음식들을 복기한 결과, 항상 저녁 라떼가 있었다는 거다. 커피를 많이 마신 날 저녁에 마지막으로 라떼를 마시면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됐다고 했다.
그는 유당불내증이다. 아침에 찬 우유를 마시면 배가 꾸룩꾸룩한다. 뭔가 소화가 안되는 듯하면서도 기분이 묘하고도 어지러운 그 느낌이 호흡곤란으로 느껴졌나 보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온다. 원효대사님도 일찍이 발견하셨듯이. 숨이 안 쉬어진다고 생각하면 숨은 안 쉬어진다. 그러니까 그의 병은 카페인 과다섭취와 유당불내증, 그리고 마음의 병이 합쳐진 복합적인 결과물이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그는 이제 저녁 라떼를 끊고, 웬만한 커피는 디카페인으로 주문하기로 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와이프나 부모의 몇 년간의 잔소리도 줄이지 못한 카페인 함량을 줄였으니까.
그는 내년에도 커피를 상당히 마실 테다. 나는 그가 커피값을 내고 받아온 굿즈들을 얌전히 잘 받아 쓸 예정이다. 왜냐면 커피는 기호식품이고, 기호가 없는 인생은 좀 심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