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5부 : 끊지 못한 사슬, 8장

by 여우비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나에게로 왔다.


엄마와 형이 공항에 도착했으면

전화를 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현서가 출근하기 전

집의 흔적을 지우려고 새벽부터

여기저기 닦고 치웠다.

깨진 컵도,

쏟아진 술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시간이었고,

술이라고 부르기엔

이미 어제에서

이어진 상태였다.


엄마와 형이 올쯤이 된 것 같아

병은 치우고 술을 따라놓은 잔만 탁자 위에 올려놨다.

아직은 과하지 않다는 증거처럼.


문을 열었을 때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락아.”


엄마가 먼저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

아픈 사람을

깨우듯 조심스러웠다.


“술 마셨어?”


그 질문이 먼저 나오는 게

엄마였다.


“조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조금’의 기준이

이미 흐려져 있었다는 거였다.


형은 말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집 안을 한 번 훑었다.

탁자 위 잔을

굳이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비켰다.


“얘기 좀 하자.”


엄마가 말했다.

명령도, 부탁도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문장이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비우지는 않았다.

아직은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엄마와 형은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예전과 달랐다.

말리려는 침묵이 아니라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괜히

잔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오늘은…”

말을 꺼내다 말았다.

“오늘은 좀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굳어졌다.


“술 없이도

얘기할 수 있잖아.”


그 말에

나는 웃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글쎄요..."


내 대답은

술기운보다

느렸다.


술이 없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 얘기를

꺼내고 싶었고,

아빠 얘기를 꺼내지 않고도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핑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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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 여우비입니다. 화창한 날씨에 가끔 내리는 찰나의 여우비는 밝게 지내다가도 순간적으로 우울함이 스쳐지나 가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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