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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픽로그 K Oct 24. 2021

억울함이라는 이름의 블랙홀

   이쯤에서 슬슬 내 이야기를 시작할까 싶다. 내가 선생님을 만난 건 내 나이 서른 때였다. 그때 나는 많이 우울했다. 내 우울은 한 10년을 거슬러 대학교 입학부터 시작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야자와 0교시 수업을 듣던 나는 벼락을 맞았는지 고3 여름방학 때 집에 연극영화과 진학을 선언했다. 당연히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고 나는 책상에 <그래 엄마 나 미쳤어!> 같은 제목의 책을 올려놓으며 소심하게 반항했다.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치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 범생이였던 내게 예체능 학부는 너무 벅찬 곳이었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20대 초반을 보내고 25살, 국문과 대학원 진학을 선언했다. 집이 한 번 더 뒤집혔다. 가족들은 모두 내 대학원 진학을 현실 도피라 여겼다. 

   그래서 잘하고 싶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자취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동시에 벌며 공부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석사를 마치면, 그다음 박사를 마치면 레드카펫 깔린 핑크빛 미래가 앞에 있을 것 같았다. 조교 근무하다 수업 듣고, 끝나면 새벽까지 일하다가 잠들고 그렇게 5년을 꼬박 달렸는데, 박사 수업을 다 들어도 내 앞에 레드카펫이 없었다. 산 날보다 더 길게 남은 앞으로의 날이 막막했다. 인생이 생각보다 길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긴장이 탁 풀리고 나니 외로웠다.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았다. 나에게는 가족과, 10년 지기 친구와, 남자친구도 있는데 너무너무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들기 전 눈물이 줄줄 났다.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다. 입맛이 없어서 살도 쭉쭉 빠져 중학생 이후로 처음 보는 숫자의 몸무게를 찍기도 했다. 그때 내 마음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똘똘 뭉쳐서 작은 블랙홀이 되어 모든 감정을 다 집어삼키고 있었다.


   앞서 말했던 이해경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이동시간에 뒤편에서 홀로 울었던 나는 저녁을 먹은 후에 눈치를 보다 선생님께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바리는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한국 신화 바리데기에 관한 질문이었다. 바리데기는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굿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바리데기는 위로 여섯 언니가 있는 딸 부잣집 일곱째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오구대왕에게 버림받는다. 시간이 흘러 오구대왕이 늙어 병에 걸렸는데, 병을 고치려면 저승에 있는 약수가 필요했다. 애지중지 키운 여섯 딸에게 물었는데 모두 거절했고 결국 버린 바리데기를 찾아 저승에 다녀오겠느냐 물었다. 바리는 알겠다며 고생 끝에 약수를 구해와 아버지를 살린다는 이야기다. 바리는 이후에 죽은 사람은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 되었는데,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이기도 하다. 바리데기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모습이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무당과 비슷하기도 하고, 무당의 기구한 팔자와 바리의 팔자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리데기 이야기를 대부분 감동적이라 한다. 그 희생이 위대하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에 들어와 접한 수많은 신화 중 바리데기가 가장 싫었다. 바리가 무작정 착한 것도 싫고 버렸던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목숨 바쳐 저승에 가는 것도 싫었다. 바리의 처지가 너무 억울하지 않나. 바리가 무당의 신이니 선생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바리의 억울함에 대해서, 그리고 내 억울함에 대해서.     


바리공주한테 억울함은 통용되는 말이 아니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거지. 억울하다는 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억울한 거야. 나한테 주어진 모든 걸 못 받아들여서 억울한 거야. 그걸 못 받아들이면 우울증이 되는 거야. 억울함은 양파씨처럼 종자가 돼. 이걸 벗어나면 인생이 바뀔 거야.


   억울함으로 시작된 인연은 서울에서도 이어져 한 계절을 선생님 서울 사무실을 오가며 무당, 무속, 굿에 관해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억울함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진 않았다. 그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억울함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억울함은 열심히 했는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거지 싶은 거다. 바꿔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 걸까?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없으면 사는 게 너무 기운 빠질 테니. 그리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왔으니. 그런데 그게 함정이다. 우리는 삶이 노력에 맞는 보상을 내려줄 거라 믿는다. 그러니 더 좋은 보상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이 굴레의 허점은 모든 게 개인의 잘못이 된다는 점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내가 더 노력하지 않은 탓이 된다. 철학가 한병철은 이런 사회를 ‘피로사회’라 부른다.     


21세기 사회는 성과사회이다. 이 사회의 주민도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긍정성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인간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한별철 지음,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23-36쪽.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 살았다.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이뤄지지 않는 건 없다고 믿는다. 사회가 아주 조금 바뀌어서 요새는 그냥 편히 살자는 담론이 형성되고 있으나 그것도 아직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열심히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나부터도 내가 왜 더 열심히 하지 못하나 고민을 많이 했으므로. 내가 나를 끊임없이 착취하며 채찍질한다.

   피로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운’에 대한 믿음이라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운이나 팔자, 사주는 삶의 20% 정도를 내가 관장할 수 있는 일 그 밖의 여지로 남겨두는 역할을 한다. 내 인생이 내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는 여지, 대충 했는데 예상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여지이다. 남들은 운이 좋은데 항상 나만 나쁜 패를 드는 것 같지만, 인생사 운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니 연속된 나쁜 패 그다음 나올 좋은 패를 기다리게 한다. 이 믿음이 그다음 좋은 운을 부른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감내할 건 감내하고 어느 만큼 이겨내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해. 세상의 구조는 피라미드야. 누구나 다 최고, 1등이 될 수 없어. 나도 대한민국 최고의 무당이 되고 싶었지. 근데 한계가 있더라고. 내가 깊은 성찰을 할수록 한계를 벗어나는 게 의미가 없더라고. 나는 안 그러고 싶겠어? 나도 탐욕스러운 인간인데. 근데 성찰하면서 깊이가 생기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뭐든 그냥 내가 행복하게.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누릴 수 있을 만큼만 가지면 돼. 인생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지금 내가 살아있으면 된 거야.     


   선생님을 만나고 내 인생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 건 없다. 나는 여전히 빠듯하게 일을 하고 그때 내 옆에 있던 사람들도 변함없다. 다만 ‘잘 하고 싶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잔뜩 굳었던 몸의 긴장은 조금 풀렸다. 누구를 향한 오기였나, 엄마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니 매일 찾아오는 아침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기운을 믿어. 기는 기대로 흐르더라고. 긍정적으로 보면 다 긍정적으로 보이고 부정적으로 보이면 다 부정적인 거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른 거야.    

   

   억울함이라는 블랙홀에 휩쓸리지 말고 살면서 20% 정도는 운에게 맡겨두고 긴장을 풀자. 그게 삶의 여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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