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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픽로그 K Apr 18. 2022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얄궂은 인생 속 통찰력

심드렁찐수다 6화

여섯 번째 콘텐츠는 산문집입니다. 제가지금껏 소개한 콘텐츠 중에서 가장 최신작이면서 한창 반응이 뜨거운 HOT한 책인데요. 2021년 11월 30일 출판된 초판 2천 부가 이틀 만에 완판되고 2022년 1월 기준으로 6쇄까지 찍은, 말 그대로 초대박작입니다. 이처럼 반응이 뜨거운 데에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최승자 시인의 개인사도 영향이 있습니다. 산문집은 줄거리가 없으니 오늘은 최승자 시인을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최승자 시인 소개

최승자 시인은 1952년 출생하여 1979년 등단하였다.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빈 배처럼 텅 비어> 등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집필했으며 이밖에도 번역 작업도 다수 진행했다. 미국에서 신비주의 공부를 하다 정신분열증을 앓으며 2001년 이후로 활동을 중단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1989년 출간된 책에 내용을 추가하여 증보한 개정판이다. 기존 25편에 1995부터 2013년까지 쓴 산문 6편을 추가로 더했다. 학창시절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에 감명받았던 난다 출판사 김민정 대표가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이다.


담배를 피는 시인의 모습과 “그만 쓰자 끝.”이라는 말이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인은 93년 발병한 정신질환으로 증보판 산문집의 교정도 보지 못합니다. 현재 경북 포항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시인은 “한 줄도 읽을 수 없고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자신의 병세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모든 괴로움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시인의 심정은 어떨까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네요.


책이 출간된 이후 김민정 시인과의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자들이 저를 알아요? 예, 저도 보고 싶어요.” ‘끝’이라 적은 두 권의 책에서, 공교롭게도 시작의 기미가 보인다.
                                                                                                   <경향신문 기사 중 발췌>


수다거리 하나, 고독과 외로움

그때부터 나는 이 고독이라는 어휘와 그것이 뒤에 후광처럼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분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독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독을 실행하기 위해서 고독의 특징을 정리해보았다. 고독의 특징은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는 것, 말을 잘 하지 않는 것,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 간간히 슬픈 미소를 띄는 것이었다.
                                                                                         106쪽, <유년기의 고독연습> 중에서.


제 부끄러운 과거를 살짝 밝혀보자면, 저는 꽤나 오랜시간을 예술뽕에 취해 살았었습니다. 뭣 모르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시절 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생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인간은 왜 고독할까, 삶이란 뭘까?’ 등의 생각이었죠. 그런 생각에 빠져 20대 초중반을 보냈습니다. 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생각은 참 중요하지만 동시에 한 개인을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예술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점점 혼자 생각에만 매몰되어 갔어요.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제게 남은 게 하나도 없더군요.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차근차근 했던 사람은 결과물을 쌓아가는데 저는 생각만 가득한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있었어요. 그 뒤로는 현실에 발붙이고 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비록 혼자만의 예술뽕이기는 하지만 고독에 대해서 고민해본 입장에서 고독을 풀어내는 최승자 시인의 시선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생각에 빠져 과거의 나를 돌아보기도 힘들고 현재의 나를 감당하기도 힘들고 미래를 계획하기도 힘들었던, 현실감 없이 붕 떠서 부유했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수다거리 둘, 성장과 통과의례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그 인생 행로에서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 외에 새로운 호칭에 여러 번 부딪힌다. 새로운 호칭을 들었을 때 그 순간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 호칭이 바뀐 그 순간에 나는 나 자신이 그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마땅히 받아야만 했었을 것들을 얼마만큼 받지 못했든 간에 이제 무조건적으로 받는 시기는 끝났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무엇인가를 줄 만큼 성숙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너무 거북스러웠다.
                                                                                                  79쪽, <호칭에 관하여> 중에서


여러분은 통과의례라는 말을 아시나요? 통과의례는 민속학자 아놀드 반 제넵이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특정 시기에 넘어야 하는 의례를 뜻합니다. 성인식, 결혼식, 입사식 등등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의식 같은 것을 말하죠. 최승자 시인은 통과의례를 호칭으로 풀어냅니다.     

30대에 들어서며 저는 ‘이모’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칭을 얻고 기분이 묘했어요.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됐는데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호칭에 관해서는 직장인들도 공감할 것 같습니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등 호칭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책임감도 달라지죠. 달라진 호칭에서 느끼는 뭔지 모를 불편할 감정을 명쾌하게 짚어주셔서 참 좋았습니다.



수다거리 셋, 서울살이와 삶의 리듬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은 자연의 시간,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쫓겨났다.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 분업화 시대를 살고 있는 샐러리맨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똑같고 그 하루가 모두 작은 불안, 불만, 지겨움들로 달그락거린다. 언제나 한 부품으로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위 부품에서 상위 부품으로 올라갈 뿐이다. 그 결과 술집이 흥청거리게 된다.
                                                                                                 98쪽, <한해의 끝에서> 중에서


생활이 도시화되면서 인간의 삶은 자연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의 리듬을 알 수 없고, 밥상에 올라오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는지를 알지 못해요. 저 또한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 자연보다 도시의 리듬에 익숙합니다. 보신각 타종, 연말정산, 학기와 방학 같은 도시의 리듬 말이죠. 요새는 여기에 주식과 비트코인의 리듬도 더해진 것 같아요.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지겨움이 자연에서 멀어진 삶과 관련이 있을까요? 이 구절을 읽고는 괜스레 집 밖을 산책하며 자연을 느껴봤습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1989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통찰이 뛰어난 책입니다. 소개한 구절 말고도 마음에 남는 구절이 참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책장에 꽂아 놓고 어떤 특정한 생각이 들 때마다 한 챕터씩 읽어볼 책이었어요.


별점 : ★★★★☆(4개 반)

한줄평 : 책장을 덮어도 마음에 오래 남는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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