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의 소명
철저한 의식의 흐름
1.
한달에 한번은 봉사를 다니려 노력했지만 천안으로 이사를 오며 새로이 몸을 담을 둥지를 찾지 못해 한동안 봉사에 소홀했다.
최근 운 좋게 천안 직장인 봉사 단체를 찾게 되어 가입하였고, 오늘 간만에 봉사활동을 다녀오게 되었다.
나는 독거노인, 요양원 봉사를 주로 다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 흔한 소재로 사용되는 고아원 봉사를 싫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을 보면 맘이 맑아지고, 내 안에 끼인 탁한 잿더미를 잠시나마 치워두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때 얻은 깨끗한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다만 어르신 봉사가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있어 더 수월할 뿐이라 주로 다니는 것 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말을 많이 할 필요 없다. 봉사를 하다보면 성향에 맞지 않는 억텐을 끄집어내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나는 맘 없이 살갑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완전히 하지 못한다.
어르신들 봉사를 가면 삶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끝이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정말 많이 느끼게 된다.
영웅처럼 내 삶을 영위하겠다는 포부나 다짐 따위는 온데 간데 없이 에너지가 고갈된 채, 기본적인 욕구만 남은 어르신들은 아이들보다 더 투명한 솔직함을 보인다.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80 90 가까운 나이까지 삶을 살아낸 그 치열함 끝에 남은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에 도달한 가장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
수 많은 부와 지식을 쌓더라도 결코 일백년의 시간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육신의 한계에 부딪혀 결국 모든 것은 기본적인 생존 욕구만 존재했던 태어난 그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뿐.
이러한 처절한 명제 아래 나의 삶은 결국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되뇌일 수 있다.
혹 의도가 불순하다고 생각이 드는가.
봉사란 흔히 생면부지 남을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희생하는 숭고한 행위인데, 나의 개인적인 깨달음의 측면에 의도가 일부 존재한다는 것. 이것 또한 명제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일부 의도에 한점 부끄러움은 없다.
나의 소명은 내가 창조한 무언가가 국가와 국민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다주는 것
봉사 또한 일부 나의 소명에 일조하고 있기에 철저히 개인적인 나의 삶의 소명의식 안에서 나는 봉사를 행한다.
봉사란 사실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되는 이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을 돕는다는 숭고한 명분 아래, 사실은 내 안의 결핍을 채우고 영적 충만함을 얻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킨다.
즉, '나의 이기심'을 가장 가치 있게 채우기 위해 '이타적인 행위'라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뿐 어떠한 숭고한 희생정신 따위를 내겐 찾아 볼 수 없다.
나는 항상 처절하게 살아가는 의미를 어디선가 찾고 있다.
2.
사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업가의 소명은 성공이라는 불분명한 욕구를 넘어 기여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유의미한 소명은 없다.
국민 더 넓게는 동족의 인간들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식을 전파하거나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사업은 어떠한 미사여구를 쳐바르더라도 이 이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이기적 자아실현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이기도하다.
3.
사업에 대한 정의가 무엇일까.
사업과 자영업은 명확히 다르다.
창조의 영역이 생략된 행위는 사업이라 일컫지 않겠다.
자영업을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어쩌면 자영업이야 말로 자신의 삶에 가장 충실하며, 성실하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숭고한 행위지 않을까?
사업가들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인내하라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들이다. 이 폭력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본인의 자아실현만이 존재할 뿐.
때문에 소명을 가진 사업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삶은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강요당하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명의 성공 여부에 따라 본인의 희노애락이 결정되는…
타인의 자아실현에 의해 본인의 자아실현이 희생되어야하는 삶은 비극에 가깝지 않은가.
돌아와 사업이란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고통이나 불편, 혹은 불합리함에서 야기된 특정한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는 행위다.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결핍에 나의 머리통 속에서 창조된 어떠한 해결책을 내던지는 것.
그 해결의 크기가 곧 사업의 크기를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 없는 사업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의지의 범주가 한단계 넓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기여’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4.
사업가들 사이에는 마키아벨리즘처럼 시장을 이용하고 극단적으로 이윤만을 쫓는 것이 영리하다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소명의식이 결여된 채 숫자만을 쫓는 행위의 끝자락에 남는 것은 결국 공허뿐이다.
하이데거적 관점에서 볼 때, 목적 없는 이윤 추구는 사물을 그저 도구로만 대하는 '존재 망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고객을 돈을 찍어내는 도구로만 대할 때, 사업가는 자아를 잃어 버린 채 스스로를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그 순간만큼은 본인이 승리하고 있다는 달콤한 환각에 빠진 채 말이다.
소명의식이 결여된 사업이 허무로 끝나는 이유는, 그곳에 나라는 인간의 '가치관'이 투영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여가 배제된 이윤은 영혼 없는 비대함에 불과하며, 결국 그 끝은 공허함뿐이다.
5.
사실 사업가든 아니든,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결국 '기여'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구는 사랑을 통해 가족에게 기여하고, 누구는 예술을 통해 대중의 감각에 기여한다.
각자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기여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삶을 움직이고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임이 틀림 없다.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 나의 행위가 타인의 삶에 긍정적인 파동을 일으켰다는 확신만큼 인간을 고양시키는 행위가 어디있는가.
훈장질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괜히 존재하겠는가.
가까운 지인이나 누군가가 내가 해결 가능한 문제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입이 근질거리지 않는가?
사업가는 단지 '사업'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 거대한 기여의 흐름에 동참할 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사업을 기여가 상실된 비윤리적인 행위로 전락시킨다면, 해소 되지 않은 기여라는 욕구는 필연적으로 오발탄이 되어 본인에게 상처를 남기게 된다.
6.
대가리 피가 덜마른 본인의 짧은 식견으로 결국 사업이란 ‘나의 가치관과 소명의식이 사회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끝없는 자아실현의 영역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시장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증명될 때, 사업가는 도때기 장사꾼을 넘어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더하여 이 소명의식 내에는 기여라는 욕구 해소 장치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한다.
아니, 애초에 기여하지 않는 소명은 문제해결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갖추지 못한 몽상에 가깝지 않은가.
기여를 이야기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뜬구름 잡는 소리나 낭만주의자의 탁상공론처럼 들릴 것이란걸 잘 알고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대는 그대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 끝자락의 나침반은 어디를 향해 가르키고 있는가.
7.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항해를 선택하려고 하는가.
최근 알지 않아도 될 사실들을 너무나 많이 알아버렸다는 기분이 든다.
그저 순수한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 거스를 수 없는 육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왜 구태여 나의 손으로 삶을 지옥으로 변모시키는가.
왜 나는 사랑하는 아내(아직 없지만)에게 나의 자아실현이라는 극단적인 이기심을 강요하는 길을 걸으려하는가.
굳이 어떠한 의미라도 부여해야하는 인간의 삶에 난 왜 이런 의미를 부여해버린 것일까.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그다지 비참하지도 않은 연극이기에
나는 수 많은 각본 중 그저 아주 조금 더 눈에 끌리는 이 각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