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일상 12

여백과 비움의 시간, 그 속에 깃든 충만

by 마법모자 김시인

여백과 비움의 시간, 그 속에 깃든 충만

박홍재 『바람의 여백』 (책만드는 집,2021)

김제숙 『홀가분해서 오히려 충분한』 (시인동네,2021)

가을의 걸음이 바빠졌다. 들판의 곡식들이 순식간에 베어져 나가고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샛노란 잎을 떨구고 있다. 이즈음이면 마음이 바빠지기도 하고 또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헤매기도 한다. 마음을 단단히 여미지 않으며 잡다한 생각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계절이다. 그래서 두 권의 작품집을 손에 쥐고 마음을 단단히 여미며 끝물 가을 속을 걸었다.


박홍재 『바람의 여백』 (책만드는 집,2021)


철새들 터를 잡은 을숙도 갈대 위로

지는 해 가덕도에 초롱처럼 내걸렸다

도요등* 까치발 딛고 목을 빼고 올려 본다

갈매기 노을 물고 섬마다 점등하자

한몫 낀 낙동강도 되비친 구름 얼개

풀등도 잦은걸음을 손잡느라 바쁘다

잉걸불 남은 여운 모래섬을 다독이자

등들은 둘러봐도 삭막한 모래들뿐

백합등** 나무와 풀 키운 장자도가 부럽다

-「풀등도 섬이 되고 싶다」 전문

자신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 갈 수 없는 자신. 파도와 바람 등 자신의 바깥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가 결정지어진 풀등, 어느 날은 속수무책으로 한쪽을 잃기도 하고 떠나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물의 힘, 바람의 힘에 의해 자신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풀등의 운명에서 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생각났을까? 항변 한번 하지 못하고 순하게 엎디어야 하는 운명, 하지만 꿈이나 희망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었나 보다. 나무와 풀을 키운 장자도를 향한 부러움, 그 풀등에 나무와 풀이 자라 섬이 되면 좋겠다. 따듯한 햇살 한 줌 내려앉으면 좋겠다. 풀등의 고요한 외침을 시인께서 들었다. 가만가만 풀등의 등을 쓸어주는 시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순하게 운명에 엎딘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도 세상의 바람이 순했으면 좋겠다.


풋것들 잘 자랐나

느닷없이 궁금해서

오늘

내일

벼르다가

남새밭 보러 갔다

고라니

발자국마다

-「텃밭」 전문


농부가 곡식 세 알을 심는 이유는 한 알은 새에게, 또 한 알은 땅속 짐승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알은 농사지어 사람이 먹기 위함이라고 한다. 시인의 텃밭이 그렇다. 텃밭의 고라니 발자국을 보고 잘 먹었다는 쪽지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곡식 세 알을 심는 농부의 마음과 닮았다. 자비의 마음이 거창한 것이 아님을 이 시에서 배운다. 그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부를 누군가를 위해 내어놓고도 아까운 마음이나 분노의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있는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이 그것이다. 생태적, 친환경적 삶을 우리는 건강한 삶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텃밭에는 고라니와 나눠먹을 수 있는 푸성귀가 자란다. 그 푸성귀를 키우는 시인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닮아있어 읽는 이의 마음도 넉넉해진다.


대지가 품은 물기

송두리째 빼앗기고

하늘엔 햇살 쨍쨍

구름 한 점 안 보인다

가슴이

벌어진 틈새

고개 떨군 풀 이파리

-「가뭄」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면 저절로 고개가 아래로 향한다. 내 가슴에도 저렇게 고개 떨군 풀 이파리가 자라고 있을까 봐. 대지의 가뭄은 생명을 키우지 못한다. 사람의 가슴도 그럴 것이다. 물기 하나 없는 쩍쩍 갈라진 가슴에 무엇이 깃들 수 있을까 종국에는 자신의 영혼마저도 황폐하게 말라가고 말 것이다. 종장이 주는 울림이 크다. 누군가에게 건넬 온기가 자라고 나를 건강하게 해 줄 튼튼한 믿음들을 키우는 가슴인지, 어떤 것이 깃들어도 생명수 한 모금 내밀 수 있는 촉촉함을 지녔는지 마음의 가뭄 지수를 가끔씩 점검할 일이다.



김제숙 『홀가분해서 오히려 충분한』 (시인동네,2021)


언 땅 아래에도 뜨거운 심장이 있다

이마 위 서리칼날 알몸으로 받아내고

흰 무명 불끈 말아 쥔

눈부신

맨주먹들

폭죽처럼 치솟는 소리 없는 함성에

일격 당한 하늘이 빗장 풀고 항복하면

천지는 그만 무장해제

환한 봄

출격이다

-「민중, 봉기하다」 전문


이 시를 읽으면 힘이 불끈 솟는다. 겨울을 이겨낸 봄 생명들의 함성에 덩달아 신이 난다. 저 패기만만함으로 들을 평정할 맨주먹들에 마음껏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맨주먹의 그들, 소리 없는 함성이 제발 하늘에, 천지에 가 닿기를. 출격, 출격 그들의 함성이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뜨거운 심장들이여, 세상에 굴복하지 마시라. 기도며 응원이다. 민중은 힘이 세다. 뜨거움의 존재들이다.

옷의 속살에는 바늘의 흔적이 있다 새들의 뼛속에는 바람의 지도가 있다 잘 마른 마음 들치면 한뎃잠 냄새가 있다

말간 얼굴에는 눈물 젖은 시간이 있다 움켜쥔 지문에는 헤쳐 온 파도가 있다

저마다

발목을 적시며

맨몸으로

건너는

-「저마다」 전문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남의 고뿔보다 더 아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예민하다. 나만 더 아픈 것 같고 나만 더 힘든 것 같다.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아프다고 느낄 때, 나만 힘들다고 느낄 때 이 시를 읽으면 좋겠다. ‘저마다’라는 단어가 이토록 강한 연대감과 위로가 될 수 있다니 새삼 그 단어가 고맙다. 이 작품은 나보다 조금 더 아픈 사람을 위해, 조금 덜 행복한 사람을 위해 마음을 내게 한다. 그리고 아우성을 삶에 대한 아우성을 잠재운다. 나만 아픈 게 아니라 저마다 아프니까. 저마다 발목을 적시며 맨몸으로 건너는 생이니까.


문해 교육 할머니

달팽이 걸음걸음

예전엔 ‘개조심’을 ‘사글세’로 보았단다

상처로 남은 사연들

얼룩진 낡은 공책

글줄이나 읽은 나도

만화방창 들판에선

무조건 노란 꽃 빨간 꽃으로 부른다

도토리 키 재는 소리

잘난 척 좀

그만해

-「나도 까막눈」 전문


‘안다’는 것이 무기가 될 때가 있고 폭력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안다’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교만이 되고 만용이 된다. 공부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학교 교육에 한정해서 인식하기도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 글줄이나 읽은 사람은 당연히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까막눈인 채로 살아갈까? 이 시는 문득, 깨달음을 주는 시이며 성찰하게 하는 시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상대를 우습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안다는 우월의식으로 겸손하지 못한 행동을 해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안다’는 것의 범위는 무궁무진하며 글을 아는 것, 들판을 아는 것 등 안다는 것의 가치는 같다는 것을 배운다.

박홍재 시인의 작품집 속에는 길이 있고 사람이 있다. 원효암, 고당봉, 흰여울길, 해파랑길, 동래 거리, 독도, 뭉툭한 손가락, 재첩국 아지매, 대리운전, 아파트 경비원, 실업자, 부부 식당, 철공소 최 씨. 박홍재 시인은 길에서 삶을 만나고 사람 속에서도 삶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사유하고 성찰한 것들을 우리에게 내어 준다. 그래서 시인이 건넨 바람의 여백은 쉼이다. 치열한 삶에 내몰린 우리는 쉼을 통해 다시 살아갈 용기와 에너지를 얻는다.

김제숙 시인의 작품은 앙금이 가라앉은 맑은 윗물 같다. 그 마알간 윗물에 담긴 시인의 사유는 고요하고 투명했다. 하지만 그 고요와 투명은 치열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되돌아보며 얻은 깨달음임이 느껴졌다. 삶은 채움이 아님 비움이라는 것을 이 작품집에서 배운다. 몇 개의 동사만으로 살아가는 오늘, 수천 조각 시간들 바람에 걸어두고 헐거워진 몸, 마른 뼈로 다시 서는, 소금 절은 이마가 고요해질 때까지 지친 길 앉혀두고서 낮 꿈을 꾸는 시인은 세상 속에서 깨달음을 좇는 수행자 같다. 그 고요함에 기댄 시간이 감사하다.

톨스토이는 “신은 무한한 전체이고 인간은 자신이 그 전체의 유한한 일부임을 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물체로서 드러난 신의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겐 깃든 신성을 자각하는 일, 자연과 사물과 세상 속에서, 사람에게서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성성한 눈빛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자세가 되어있는지 한 해의 마무리 즈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래시조 겨울호 열린서가에 올린 글입니다. 2017년 여름호부터 나래시조 열린서가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한 편의 시를 오롯이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순전히 제 느낌의 감상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또 저와 같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브런치에 공유합니다.


#나래시조 #박홍재 시인 #김제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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