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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법모자 김시인 Jan 17. 2023

詩詩한 일상 19

안개에 갇힌 날

지난 금요일, 부산을 다녀왔다. 겨울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지던 날이었다. 대구에 사는 친구와 동행을 약속한지라 그 친구가 탄 기차를 타면 되겠다 생각하며 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친구가 대구에서 10시 35분 출발하는 기차를 탄다고 했으니 57분쯤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고 표를 예매하려는데 그즈음의 열차는 없다는 것이다. 더 난감한 건 제일 빠른 열차표를 검색하니 11시 29분이다. 부산행 열차가 자주 있는 편이고, 거의 대다수의 열차가 이곳에서 정차하는 것 같아 시간표를 따로 검색해 보지도, 예매를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어 미안하고 12시에 만나기로 한 중학교 때 선생님과의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어 난감하고 죄송하고 면목이 없었다. 그 와중에 열차까지 연착을 했다.


부산역에서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를 만났다. 근처에 살던 중학교 동창이 먼저 도착해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를 위해 달려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친구들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 선생님을 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시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시간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야기 속 우리는 10대 소녀였고, 선생님은 우리 앞에서 자주 얼굴이 빨개지시던  20대 총각 선생님이셨다. 그 시절 우리는 몇십 년 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했을까?


선생님과 헤어지고, 친구가 하는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에 사는 친구는, 친구들의 소식을 많이 알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살면서 가끔 소식이 궁금했던 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리고 우린 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영도다리를 건넜다. 가게를 아들에게 맡기고, 기꺼이 운전을 해 준 친구 덕분에 우린 낯선 부산에서 하나도 헤매지 않고 다른 친구의 직장까지 들어가 건물 입구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 시절의 추억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막차를 놓치게 될까 시계를 자꾸 볼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열여섯 살처럼 놀았다.


꽉 채운 하루를 마치고 울산역에 내리니 지독한 안개가 나를 맞았다. 하루의 경험이 안개처럼 몽환적으로 나를 감쌌다. 40여 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존재했었나 싶을 만큼 우린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었고 편했다. 그때의 우리는 아련하고 애틋했다.


열여섯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상상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의 우리는 열여섯의 우리를 기억하며 행복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친구들이 살아냈던 시간의 행간을 뒤지지 않아도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살면서 또 어느 날 몽환적인 안개를 만나게 되리라. 지독한 안개에 갇혀 때로 두렵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몽환적이든, 두려움이든 안개는 걷힌다는 걸 알아서 '지금 여기'의 나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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