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대하여
1.
한 숫자에서 다른 숫자로 몸을 싣기 위해 3분 가량을 걷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 1분,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모든 사념을 뒷덜미 너머로 밀어놓고 턱을 들고 시선을 멀리로 내던져야 한다.
시선의 끝 그리고 그 너머에는 내가 봐온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있다.
2.
그것에게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의 두 가지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매번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다. 나는 그것을 볼때면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잊는다. 나는 멀리 그것에서 모든 그것을 본다. 특수한 그것과 영원한 하나의 그것을 동시에 본다.
3.
임마누엘 칸트는 개념을 초월하여 모든 분류, 규정, 설명을 거부하되 다시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해줄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어떤 것들에게서 비로소 아름다움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살아있게 한다. 자유롭게.
이름에 갇히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은 오로지 필연적으로 또 영원히 자연에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모든 인위의 대립항이므로 우리는 어떤 언어도 그것과 온전히 대응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안다. 인간의 선험적인 모든 앎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관념이나마 앞에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과 정지로써 겸양하고 경외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것. 자연을 이루는 모든 극미한 것에조차 우리가 가진 상징의 전부가 있음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모든 상징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4.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지르는 숨막히도록 거대한 산맥이 그의 동맥, 멎지 않는 뿌리깊은 물의 흐름이 그의 시리고 세찬 정맥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수십 초 남짓 보게 되는 그 아름다운 산은 정교한 그의 혈관의 어느 줄기 쯤일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생명과 생명 사이 움푹한 골짜기에서 무언가를 끝없이 가늠하느라 일생을 다 보내게 될 것만 같다. 그 생각을 하면 눈앞을 흐리는 두통에서도 잠시 황홀할 수 있다.
5.
우리는 산을 안다고 자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떠올렸을 때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조성되어 이름붙여진 길이나 봉우리에 세워둔 해발고도가 적힌 비석 같은 것을 연상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알고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된 도시들을 경험했다고 행성 전체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나와 우리는 문명과 함께 일찍이 추방되었다. 빽빽하고 무거운 잎사귀들과 가지들이 먼 하늘을 틈없이 가린 캄캄한 한낮의 산비탈에서,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견고한 소음으로 가득한 정적에서, 손짓 한 번에 두개골이 부서지는 저항할 방도 없는 위협에서. 익숙한 이름 아래 가려진 본질에서.
몇 년을 들여 힘겹게 길을 낸 선 위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된다. 비바람이 거세어 흙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눈이 녹아 매끈한 낙엽 위에 살얼음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산은 그 선으로의 출입조차 금한다. 어느 때든 홀로 고립되었을 때 깊은 산속은 그 어느 공간보다 위험하다. 해가 지면 산은 우리에게 위험 그 자체가 된다. 사고를 마비시키는 위험은 모든 곳에 있다. 외침은 동굴 속에서처럼 너르게 울리지만 닿지 않는다. 자작나무 숲에서 마주하는 수천개의 눈. 모든 굴곡이 곧 시간이 되는 소나무. 오래전에 세상의 근원으로 천명된 보리수와 물푸레나무. 시야를 가리는 얇은 들풀과 손 안에서 흩어지는 흙. 대지에 뿌리를 박은, 명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천억개의 우주들. 모든 색 향 맛 소리 그리고 형상.
사방이 생명으로 가득하지만 어떤 생명은 그곳에 섞일 수 없다. 스스로 번영하는 그는 풍요로우나 관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