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급 비기너의 검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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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삼동작. 하나.
-(검을 들어올림)
-아니야. 다시. 하나가 빠졌어.
-...발구름 말씀이십니까?
-아니. 다시 생각해봐. 하나 빠졌어.
-아 기합입니다.
-그래 기. '기검체 일치' 못 들어봤어? 검과 몸이 하나가 된다. 근데 그 전에 선행하는 게 있어. '기'가 제일 먼저야. 눈 앞의 상대를 치려는 마음이 있어야 돼. 그 마음이 의지가 되고 의지가 기세가 되고 기세는 기합으로 나와야 하는거야. 기세에서 지면 더 볼 것도 없어. 이미 알지? 검도 배웠다고 했으니까.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항상 타격할때는 배랑 등에 힘주고 소리를 내질러야 돼. 뱃심이라는 말 들어봤어? 기합은 배랑 등에서 나와. 뱃심이 모이면 배짱이 되는 거야. 배짱 없으면 검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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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할 때 없애야 할 게 네 가지 있어. 뭔지 알겠어? 말해봐.
-...두려움?
-그래 그것도 맞아. 일단 첫째, 놀라 주춤하거나 서두르지 말아야 해. 아까 자네가 성격이 급하다고 했는데, 검도는 절대 허둥대거나 급하면 안 돼. 중단 해봐. 자 이렇게 중단 자세에서부터 딱 중심 잡고 검을 겨누고 상대를 똑바로 보면서 침착하게 가늠하고 파악하는거야. 그리고 기회가 오면 그때 확실하게 치는거야. 놀라 어영부영 얻어걸리기를 바라면서 어설프게 치면 이길 리가 없어.
-예 맞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까 자네가 말한 것처럼 두려워하면 안돼. 상대가 누구든 실력이 어떻든. 지고 이기고의 문제가 아니야. 두려우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내 기량을 제대로 못 쓴다고. 상대에게 맞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내 걸 발휘 못하는 건 문제가 돼.
-(격한 고개 끄덕임)
-셋째.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주춤거리게 되는 상태. 검도 오래 한 사람들 눈에는 칼을 맞대고 있는 사람 속에 그 의심이 있으면 바로 보여. 그 말은 곧 기세에서 이미 패했다는 거야.
-예...
-넷째. '혹'이라고 하는데, '의혹'할 때 혹이야. 생각이 너무 많아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관장님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 말해봐.
-그 네 가지를 없애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 데는 선천적인 게 크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누구나 수련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음... 시작할 때는 당연히 본인 성격에서 시작하지. 너무 소심하거나 겁이 많은 사람은 하기 힘든 운동이야. 근데 자네는 이미 자신감이나 기세는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ㅎㅎㅎ예... 감사합니다. 근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검을 들 때 되게 조급하고, 기합을 내지르면 바로 평정을 잃게 됩니다. 그 조급함의 원인이 스스로를 믿지 못해 계속해서 마음이 다급해지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그건 검도를 계속하면 나아질 거야. 그럼 자네는 앞으로 검을 들어올리려 하는 순간마다 생각해. 지금이 맞는지. 거리가 충분하고, 상대가 빈틈이 있는지. 그러면 돼. 알겠지?
상대를 제압하거나(유도, 레슬링, 주짓수와 같은 그라운드 그래플링 류) 전투불능으로 만드는(복싱, 무에타이, 태권도, 가라테와 같은 입식 타격기) 모든 격투기에서 빈틈을 보이는 한순간에 승부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검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칼을 맞댄 상황에서 빈틈을 보이면 제압당하거나 전투불능이 될 틈조차 없다. 빈틈을 보이면 정수리에서 턱까지 머리가 갈라지고 검을 든 손목을 잘리고 허리가 갈리고 목 정중앙을 검이 뚫는다. 죽음에 대한 유예가 없는거다.
1초 간격으로 인해 내가 <패한다>가 아니라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마음가짐이 비장해지겠냐고..
검도는 이제 당연히 전장이 아닌 도장이나 대련장 위에서, 진검이 아닌 죽도로 이루어지는 운동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원리는 같다:
기검체일치(의지 혹은 기세와 / 검과 / 몸이 하나가 된다)는 온 마음과 몸으로 상대를 베기=죽이기 위함이지만
경구의혹(놀라 평정을 잃음/두려워함/의심함/방황함)에의 경계는 베이지 않기=죽지 않기 위함이다.
내가 베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베여서 몸이 두 동강이 나면 돌이킬 수 없다
다시 힘을 끌어모아서 반격을 꾀하거나 충격을 갈무리할 시간을 벌 수 없거든.. 이미 죽었거나 손목이 잘렸으니까.
그래서 대련을 할 때는
가. 상대를 반드시 벤다
나. 빈틈을 보이면 죽는다
가 동시에 머리와 몸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곧
가. (상대를 반드시 벤다) 배짱과 살의를 끌어모아서 단숨에 공격한다
나. (빈틈을 보이면 죽는다) 눈 깜빡 않는 집중력으로 얼음장같은 고요함을 유지한다
가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살벌하게 어렵다.
배짱과 살의만으로 달려들면 > 사망
얼음장같이 고요하기만 하다 공격하지 못하면 > 사망
...
그러니까 사망하지 않으려면
자세를 바로세워 고요하게 집중하며 기다리다가 -> 상대의 검에 베이기 전에 내가 0.1초라도 먼저, 폭발하듯 배짱과 살의를 끌어모아 쳐야 한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봐도 어렵다. ‘말이 쉽지’라는 생각도 안들고 그냥 숙연해진다.
검도가 미친듯한 운동신경과 재능만으로 승부를 볼 수 없는 운동인 것, 또 수련한 햇수에 따라 단 취득 자격을 차등 부여하는 체제는 이런 이유에서다.
가. (상대를 반드시 벤다) 배짱과 살의를 끌어모아서 단숨에 공격한다
나. (빈틈을 보이면 죽는다) 눈 깜빡 않는 집중력으로 얼음장같은 고요함을 유지한다
이걸 동시에 갖춘다는 건 그냥 운동신경과 피끓는 혈기만으로 될 수가 없다. 대련 몇 번만 해봐도 느낄 수 있다.
많은 도장에서 번거롭다는 이유로 때로 생략하거나 축약해서 진행하지만, 원칙적으로 검도는 다른 운동에 비해 이것저것 지켜야 할 게 많다.
예를 들어:
1) 호구를 쓰고 벗을 땐 단이 높은 순부터 낮은 순으로 일렬로 늘어서서 무릎을 꿇는다. 특히 벗을 때, 가장 단이 높거나 오래 한 사람이 ‘호면 벗어’ 하고 기합 지르듯 명령하고 본인의 호면을 벗기 시작하면 꿇어앉은 채로 기다렸다가 내 옆의 사람이 벗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벗을 수 있다. 이때 ‘호면 벗어’가 있고 나면 모두가 일제히 침묵 속에 고요히 호완과 호면을 벗어야 한다.
2) 마지막 사람까지 호완과 호면을 벗고 나면 갑과 갑상을 벗기 전에 꿇어앉은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묵상한다. 묵상을 마친 후에 다 함께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 관장님께 경례, 상호간의 경례를 한다(원칙적으로는 절..을 해야한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나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 꿇어앉고 갑과 갑상을 마저 벗는다. 역시 일동 침묵 속에서.
3)호구와 죽도는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호구는 각을 잡아 정성껏 정돈해야 한다. 죽도는 검 끝이 바닥에 닿는 일이 없도록 한다. 검을 바닥에 짚고 서거나 휘두르며 장난을 치거나 끝을 발로 차는(!) 일은 절대 삼간다.
4) 대련을 시작할 때는 상대와 아홉 걸음 떨어진 상태로 마주본다. 칼을 든 손을 허리에 들어올리기 전에=칼을 차기 전에 반드시 상호 목례한다. 칼을 찼다면 이미 살의가 우선하므로 칼을 차기 전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세 걸음째에 칼을 뽑아 선혁이 닿는 거리에서 마주대고 겨눈다.
대련이나 시합이 끝난 후에는 반대로 진행한다. 칼을 찬 채로 뒤로 다섯 걸음. 칼을 내리고 다시 상호 목례한다.
등등.
사실 꽤나 엄숙한 규칙들이고 일부 형식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형식적인 규칙 앞에서 꽤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일단 처음 봤을땐 그 모든 것들이 멋있어보여서(^^) 괜찮았다. 근데 지금에 와서는 검도의 예의 대부분에 관해 몸으로 납득한 상태다.
다시 1, 2번으로 얘기가 돌아가는데, 제일 본질은..
그 모든 번거로운 예의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수련에 가깝다는 거다. 죽지 않기 위한 수련.. 말했다시피 1초 전까지 소리 빡빡 지르면서 온 몸을 써서 상대를 타격했어도 다시 1초만에 재빠르게 뒤돌아 자세를 바로세우고 호흡을 가다듬고 호면 너머 상대의 눈을 보면서 고요하게 집중해서 다음 타격할 수를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숨넘어가게 힘들어서 헉헉대고 아드레날린에 온 몸의 감각이 날뛰다가도 한순간에 무릎 꿇고 침묵 속에 조용히 꿇어앉아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다 보호구를 벗고 정성껏 정리하는 차분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묵상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내가 먼저 베고 쳐서 죽이겠다는 살벌한 마음가짐을 갖고 들어가면서도 상대와 마주한 채로 목례하고 다가서는 순간부터 차분히 집중해서 탐색해야 한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방어의 수단인 호구와 공격의 수단인 죽도를 대할 때의 습관적인 방만함이 시합에서 일 초라도 드러나는 순간 죽는다. 죽도를 들고 호구를 쓴 상태에선 자동으로 마음가짐이 바로잡히도록 훈련하는거다.
이렇게, 처음엔 그냥 멋져!(^^)라고만 생각했던 규칙과 예의들이 사실은 내 머리로 칼이 들어오는 결정적인 1초가 왔을 때 죽지 않기 위한 연습인 걸 점차 깨닫게 된다.
그걸 느끼고 나면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그때부터 검도가 정말로 재밌어지는 거다.
2024.07.24
202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