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지방 사람이다.
신랑친구와 내 사촌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우리는,
지방과 수도권을 오가며
1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고려해 볼 만한 나이인 30대 초반에 신랑과 교제를 시작한 나이지만,
시부모님은 결혼을 약속하고,
신랑의 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가서 처음 뵈었다.
그게 얼마나 무지한 일이었는지,
결혼생활 십 년이 넘어,
아이를 키우면서도 머리를 가끔 쥐어박곤 한다.
결혼이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둥,
두 집안의 일이라는 둥,
어른을 보면 신랑감 성격을 안다는 둥,
이미 많이 겪어 오신 선배 꼰대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러 들은 무지렁이 꼰대가 바로 나인 것이다.
이제 와서 느꼈다 한 들, 또 한 번 내 머리를 가열하게 쥐어박을 뿐이지만,
한껏 답답해하며,
나와 싸움이 일면,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신랑을 마주하며
'왜? 도대체 왜?'란 질문에 가슴을 치며, 또 한편으론 욕을 냅다 하며,
이리저리 선배 어머님들의 자문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동남아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에서 하루를 잔, 다음날
집에 출장을 와 폐백요리를 만들어주는,
요리 선생님에게 부탁한 밑반찬 등을 예쁜 통에 담아 시댁으로 향했다.
지금도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반찬을 해갔었고,
하룻밤을 잔 다음 날, 시어머니는 그 반찬으로 아침상을 차려내셨다.
구워야 되는 더덕구이를 도라지 무침인 듯,
그냥 상에 올리셨지만,
갓 결혼한 새댁은 구워야 된다는 말을 입안으로 삼키고,
안 넘어가는 밥을 먹었다.
상을 물리고 KTX를 타러 차비를 하는 나를,
시어머니께서 부르신 후,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지금 보면 참 순진무구한 나는,
그게 올라갈 때 차비에 보태 쓰라는 용돈인 줄 알았더랬다.
친정에서 주신 올라가면서 간식 사 먹으라며 주신, 용돈 봉투처럼 말이다.(바보 멍텅구리)
앞에서 열어보지도 못하고,
들고 나와 열어본 봉투 안에는,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신랑의 큰아버지 제사날짜와 시부모, 시누 생일 날짜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걸 본 그때의 그 마음이 뭐였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가슴이 답답한 걸 보니, 많이 유쾌하진 않고,
입안이 텁텁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