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상상이 빚어낸 찬란한 슬픔.

왕과 사는 남자

by 민태선


1. 거대한 역사가 아닌 '사람'의 시간에 주목하다


<왕과 사는 남자>의 가장 큰 미덕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단종' 하면 계유정난이라는 피의 숙청과 수양대군이라는 권력의 화신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거창한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강원도 영월 청령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인간 이홍위'가 보낸 마지막 시간에 주목합니다.


영화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가 유배 온 어린 왕 이홍위(박지훈 분)를 감시하는 '보수주인' 역할을 맡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초기 설정은 다소 코믹합니다. 마을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유배지 유치를 '호재'로 생각했던 촌장과, 삶의 의지를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어린 왕의 만남은 장항준 감독 특유의 재치 있는 연출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감시자와 피감시자라는 경계는 허물어지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가여워하며 곁을 지키는 '공존'의 서사로 나아갑니다.


2. '유해진이 유해진했다'와 '박지훈의 재발견'


이 영화가 천만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 중 8할은 배우들의 호연입니다.


촌장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특유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유머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사극의 분위기를 환기하며, 후반부 감정의 파고가 몰아칠 때 관객들이 그를 믿고 따라가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유해진이 유해진했다"라는 관객평은 그에 대한 최고의 찬사입니다.


하지만 대중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단종 역의 박지훈입니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내고, 처연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으로 폐위된 왕의 고독을 완벽히 형상화했습니다.


특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소년 왕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박지훈의 눈빛이 영화의 개연성"이라는 극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명회 역의 유지태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와 전미도, 박지환 등 연기파 조연들의 조화는 영화의 완성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3. '난리난' 이슈들: 호랑이 CG부터 표절 논란까지

흥행의 열기만큼이나 논란도 뜨겁습니다.


개봉 초기 가장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은 이른바 '밤티 호랑이' CG 논란이었습니다.


극 중 긴장감을 조성해야 할 호랑이가 다소 어색하게 묘사되어 "종이 호랑이냐"라는 웃지 못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일정 조율 과정에서의 아쉬움"을 인정하며 VOD 및 향후 버전에서의 CG 수정을 약속하는 이례적인 결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더 큰 파장은 표절 의혹이었습니다. 2000년대 작성된 드라마 <엄흥도>의 시나리오와 주요 설정이 유사하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는 없는 '궁녀 캐릭터의 축약'이나 '자녀 수의 변경' 등이 일치한다는 점이 쟁점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제작사 온다웍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보편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며 창작 과정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며 단호히 반박했습니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장르에서 '창조적 우연'과 '저작권적 독창성' 사이의 법리적 공방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러한 논란조차 영화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증명하는 반증이 되었습니다.


4. '항준적 사고'와 2026년의 시대정신


장항준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의 연출 인생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는 자칭 '신이 내린 꿀팔자'라는 유쾌한 이미지 뒤에 날카로운 작가적 역량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리바운드> 등에서 보여주었던 '실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는

<왕과 사는 남자>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죽음을 향해가는 왕을, 비천한 신분의 촌장이 따뜻한 밥 한 끼로 위로하는 장면은 2026년 현재를 사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 나의 곁을 지켜준다는 '연대'의 메시지가 사극이라는 틀을 빌려 시대를 관통한 것입니다.


부족한 CG마저 입소문으로 승화시킨 그의 '항준적 사고'와 마케팅 전략은 영화의 흥행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5. 결론: 역사가 지우려 했던,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적 비극을 신파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비극의 틈새에 존재했을 법한 인간적인 온기를 채워 넣었습니다.


1,200만 관객이 극장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유명 배우가 나와서나, 장항준 감독이 재밌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의 냉혹함보다 인간의 다정함이 더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대중의 열망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는 단종의 죽음이 아닌 그와 함께 살았던 엄흥도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비록 역사는 엄흥도의 충심을 단 몇 줄로 기록했지만, 영화는 그가 보냈던 수많은 밤의 고뇌와 우정을 2시간의 영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논란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쥔 이 작품은 한국 영화계에 '좋은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준 소중한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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