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마음도 주름 졌으면 좋았을 것을.
때론 마음도 주름졌으면 싶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사람이 보인다.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
예전보다 힘이 빠진 턱선,
흰머리가 섞이기 시작한 관자놀이.
분명 내 얼굴인데,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얼굴이 아니다.
몸은 시간을 충실하게 기록한다.
햇볕을 얼마나 받았는지,
얼마나 웃었는지,
얼마나 찡그렸는지를 피부에 새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몸도,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주름지지 않는다.
이것이 축복처럼 들린다면,
아직 그 무게를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마흔이 넘어도,
쉰이 넘어도,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면 스무 살 때처럼 얼굴이 달아오른다.
오래전 헤어진 사람의 이름을 우연히 들으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오랜 친구와 멀어졌을 때의 허전함은 열여섯 살 때와 다르지 않다.
몸은 분명 세월을 먹었는데, 마음은 그 세월을 비껴간 것처럼 여전히 날것이다.
상처를 받으면 아프고, 사랑을 하면 설레고, 불안하면 잠을 못 이룬다.
나이가 들면 이런 것들이 무뎌진다고 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니 무뎌진 것은 무릎과 허리뿐이다.
사람들은 나이 듦을 성숙과 동일시한다.
나이가 들면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으며,
세상을 넓은 눈으로 보게 된다고.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라고.
그런데 그 말은 반만 맞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은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감정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둘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때론 마음도 주름졌으면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름은 무뎌짐의 표시가 아니다.
주름은 적응의 흔적이다.
피부가 주름지는 것은 그 자리가 오랫동안 접히고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마침내 그 움직임에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자주 웃은 자리에 웃음 주름이 생기듯, 경험이 쌓인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이 있는 곳은 더 이상 처음처럼 날카롭게 아프지 않다.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이 처음 연장을 잡던 날보다 덜 아프듯이.
마음에도 그런 주름이 생겼으면 싶다.
상처받은 자리가 조금은 두꺼워져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아프지 않았으면 싶다.
같은 종류의 이별 앞에서 스무 살 때처럼 무너지지 않았으면 싶다.
같은 말에 같은 깊이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싶다. 그것이 냉담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냉담함은 감정의 소멸이지만, 주름은 감정의 성숙이다.
아프되 예전만큼 오래 아프지 않은 것, 흔들리되 예전만큼 깊이 쓰러지지 않는 것.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주름지지 않는다. 왜인가.
몸이 주름지는 것은 몸이 시간 앞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몸은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고, 그 흔적을 표면에 남긴다.
그런데 마음은 다르다. 마음은 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상처를 덮고, 기억을 봉인하고, 감정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주름이 생기려면 충분히 접히고 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그 과정을 자꾸 중단시킨다.
아프기 전에 차단하고, 슬프기 전에 외면한다.
그래서 같은 자리가 계속 새 상처처럼 아프다.
한 번도 제대로 아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주름지지 않는 것은 강해서가 아니다. 아물 기회를 얻지 못해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변하는 것과 성숙하는 것은 다르다.
몸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변하지만, 마음은 시간만으로는 성숙하지 않는다.
마음의 주름은 시간이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끝까지 통과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다.
슬픔을 덮지 않고 슬퍼한 사람,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아파한 사람,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마주한 사람.
그 사람의 마음에만 조금씩 주름이 생긴다.
때론 마음도 주름졌으면 싶다는 말은, 결국 이런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충분히 아파본 적이 없다고.
감정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늘 중간에 차단해왔다고.
그리고 그래서 여전히, 같은 자리가 처음처럼 아프다고.
주름은 약함의 흔적이 아니다. 끝까지 겪어낸 사람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