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지나치며 본 성인기구샵.

법적으로 문제 없는 어른으로써 부끄러움을 담보로 구할수 있는 기구.

by 민태선

열여덟, 혹은 열아홉.

나라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라는 자격이 주어진다.


술을 살 수 있고, 담배를 피울 수 있고, 투표를 할 수 있고, 법적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조용히,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지만, 성인용 물건을 살 수 있는 권리도 그날부터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술은 사도 괜찮고, 담배는 피워도 어른스럽다고 하고,

카지노에서 돈을 잃어도 그건 개인의 선택이라고 한다.

늦은 밤 혼자 술을 마시는 것도,

몸에 해로운 것을 즐기는 것도 성인의 자유라는 말로 포장된다.


그런데 성인용품 가게에서 무언가를 샀다고 말하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눈빛이 달라진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괜히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똑같이 성인이 되어서 얻은 권리인데,

왜 이것만 유독 꺼림칙한 것이 되는 걸까.

왜 이것만 숨겨야 하는 것이 되는 걸까.


성욕은 식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둘 다 생존과 연결된 본능이고,

둘 다 강도에 개인차가 있으며,

둘 다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식욕이 강한 사람에게 우리는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맛집을 찾아다니고, 비싼 식재료를 사고,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을 보며 우리는 오히려 함께 즐긴다.


먹방이 콘텐츠가 되고, 셰프가 스타가 되고, 식도락은 하나의 문화가 된다.

식욕이 강한 것은 개성이고, 취향이고, 심지어 매력이 된다.


그렇다면 성욕은 왜 다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성욕을 혼자 해결하려는 시도는 왜 다른가.

파트너 없이, 관계 없이, 오직 자신의 필요를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는 왜 유독 시선을 받는가.

같은 욕구인데, 같은 해소인데, 왜 이것만 어딘가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회가 성을 어떻게 바라봐왔는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성은 오랫동안 관계의 언어였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는 것,

그리고 그 둘은 일정한 형식 안에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범이 있었다.


결혼이든, 연애든, 어떤 형태로든 사회가 인정하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정상이고,

그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일탈이거나 부끄러운 것이었다.


성은 항상 누군가와의 관계를 전제했고, 그 관계망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구조 안에서 성인용품은 묘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관계를 대체하거나, 관계 밖으로 나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연애라는 전쟁터에서 몰래 탈영한 사람처럼.


사람과 부딪히고 상처받고 감정을 소모해야 마땅한데,

혼자 조용히 해결해버리는 것이 어딘가 반칙처럼 읽히는 것이다.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누구를 해친 것도 아닌데, 게임판을 이탈한 사람 보듯 한다.

하지만 이 시각은 전제부터 이상하다.


왜 성이 반드시 관계를 통해서만 해소되어야 하는가.

왜 혼자 해결하는 것이 사회적 전장에서의 도주처럼 읽혀야 하는가.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것은 꽤 합리적인 소비자의 선택이다. 필요가 있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성인이라는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선택하면 된다.

이것이 왜 설명이 필요한 일이 되는가.

왜 이 합리적인 선택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가.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이 보인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표정으로, 분위기로, 말의 온도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는 단순한 도덕적 판단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불편함. 혹은 이상하게도, 억울함 같은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참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했고,

감당하기 싫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욕구를 관리해야 했다.

연애는 감정 소모였고, 관계는 책임이었으며, 성은 언제나 무언가와 연결된 복잡한 것이었다.


그 복잡함을 감내하는 것이 어른의 방식이라고 배웠다.

혹은 그렇게 믿어왔다.


그렇게 다 감내해온 사람이, 혼자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사람을 본다.

그때 드는 감정은 경멸이 아니라 어쩌면 부러움일 수 있다.


내가 참아온 것을 저 사람은 참지 않는다는,

내가 복잡하게 풀어온 것을 저 사람은 단순하게 풀어버린다는,

그 낯섦과 억울함이 시선이 되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판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오래 눌러온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인 것은 아닐까.

결국 문제는 성인용품이 아니다.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 포기해버린 권리들이 문제다.


성인이라는 자격은 자유를 포함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억누르며 산다.

어른답게 행동해야 하고, 어른답게 보여야 하며, 어른이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 오히려 늘어난다.


그 목록 안에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포함되어버린다.

성인이 되었는데 성인의 욕구를 인정하면 안 되는 이상한 구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성욕은 있는데 없는 척한다.

도구가 있는데 부끄러운 척한다.

필요가 있는데 필요 없는 척한다.


이렇게 자꾸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다 보면,

그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불편해진다.


거짓말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하고 낯선 것이 된다.


왜 성인은 성인이 가져야 할 권리를 잊는 걸까.

아니, 잊은 게 아닐 수도 있다.


잊은 척하는 법을 너무 잘 익혀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연습을 오래 해온 사람일수록, 잊은 척하지 않는 사람을 보며 더 크게 불편해한다.


그 불편함의 진짜 이름은 판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오래되고 조용한 억울함이다.


성인은 성인의 것을 가질 수 있다. 그게 권리였다.

그 권리를 조용히, 당당하게 행사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시선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무엇을 오랫동안 참아온 걸까,

성욕을 참아 온걸까.

아니면 자신의 책임감을 참아 온것일까.


새로 생긴 성인용품샵을 지나친다.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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