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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여행 Dec 31. 2024

우리들의 축제

난 알아요!

아이를 데리러 가기 20분 전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내 첫사랑을 보았다. 준비하고 나가야 하는데 자꾸 쳐다보게 된다.


'서태지 25주년 라이브 타임:트래블러'

그는 여전히 앳된 모습으로 노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옆에는 이주노, 양현석과 닮은 춤새와 옷을 입은 20대의 가수 2명이 있었는데 서태지가 막내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예전부터 드라큘라 아닌가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면 어쩌지.. 남편은 옆에서 계속 얘기했다.

"저거 서태지 맞아? 닮은 사람 아니야? 저렇게 젊을 수가 없어."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계속 얘기한다. 맞다고 우리 태지오빠. 딱 보면 알지. 근데 아무리 봐도 세월을 비켜나가긴 했다.


내가 언제부터 서태지를 좋아했지? 아마도 2집 하여가가 나왔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앨범 중 '너에게'라는 곡테이프를 수백 번 돌려서 들었다. 서태지가 누구를 생각하며 이 가사를 썼을지 시샘이 나기도 했고 가사 내용이 슬퍼 누가 그를 이렇게 슬프게 했을까 생각하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사서함이란 것이 있었다. 가수들이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태지예요~"

비음이 섞인 그의 목소리전화기로 들을 때면 직접 나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설레었다.


서태지는 매년 음반 하나를 발표하고 활동하다 미국에 가서 작사, 작곡을 해서 다음 해 새로운 앨범을 들고 왔는데 발매할 때마다 항상 이슈를 몰고 왔었다. 문화대통령이라 불렸던 그를 좋아하면 나도 왠지 보는 눈이 있고, 그와 급이 같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그의 팬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남자치마, 사랑얘기가 아닌 시대를 반영한 가사들, 처음 접하는 음악장르들.. 모든 것이 멋있어 보였으며 그가 내가 좋아하는 가수임이, 내가 그의 팬인 것이 자랑스러웠.


그러다 3집 교실이데아를 역재생하면 "피가 모자라 배고파"라는 소리가 난다는 소문으로 인해 출석하던 교회에서는 서태지 3집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했고, 당시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던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중한 보물을 내어놓았다.

교회에서 사탄 등 관련된 강의들을 들으면서 의구심이 점차 생겼고, 그와 조금은 마음에서 멀어지는 듯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최고였다.



4집 컴백홈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그를 드디어 직면할 기회가 생겼다. 집 근처였던 아주대 운동장에서 mbc 음악방송을 생방송으로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선생님그날 사람들이 몰릴 것이 염려되어 절대 가지 말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친구네 집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우리는 운동장으로 갔다.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많았고 중간쯤에 겨우  앉았던 우리는 서태지와 1위를 다투었던 육각수의 '흥부가 기가 막혀', 이소라의 '난 행복해' 등 리허설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태지는 본방송 때만 나타났는 '컴백홈'이 나오자마자 모든 이들이 갑자기 앞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나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밀려 나갔다. 순간 누군가 넘어지고 그 위에 넘어지고 깔리고 내 친구도 나도 깔렸다. 깔리니 숨쉬기 힘들었고 죽을 것만 같았다. 아래에 친구가 깔렸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눈에 담았다.

노래가 끝나자 다행히 사람들은 진열을 되찾았고 운동장 사방은 버려진 가방에 책과 물건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마음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눈 앞에서 봤다는 감동으로 가득찼다.


그런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고 단발머리의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서프라이즈한 가수의 서프라이즈한 은퇴식이었다. 그 충격은 한동안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떠났던 그 몇 년 뒤 어느 날 다시 돌아왔다. 좋긴 했지만 내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았기에 덤덤이 받아들였고 이전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었을까. 서태지 1집까지 듣고 2집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도 아니거니와 입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 뒤 10년이 지나 그의 이혼소식을 들었다. 며칠간은 충격을 받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는 갑자기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창작의 고통이 힘들어서 은퇴도 했는데 그도 기댈 사람이 필요했겠지 머리론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모든 일들이 다 놀라움의 연속일까. 미혼인 줄 알았더니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이혼소송을 한다니...

어린 시절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 마음이 이제는 변해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내 10대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사람이라 우연히 티브이에서 볼 때면 가슴이 아리고 응원하게 된다.


음악프로그램에 나올 때마다 녹화던 비디오테이프와 정규앨범 테이프, 그의 사진,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놓았던 파일 아직 친정집에 남아있다. 어린 시절 열정을 쏟을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고맙다. 그의 앞으로의 길도 end가 아닌 and이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랜만에 그의 노래를 불러본다. 


... 어른들은 항상 내게 말하지
넌 아직도 모르고 있는 일이 더 많다고
 네 순수한 마음만 변치 않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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