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설날인가
올 설은 유난히도 눈발이 날렸다. 일주일 전쯤 발가락에 금이 가 반깁스를 하고 있었던 터라 이번 성묘에는 차에서 기다리거나 시댁에서 쉬라고 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폭설로 성묘 자체를 가지 않기로 했다. 성묘를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버님을 뒤로 한채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니 어릴 적 즐거웠던 명절이 떠오른다.
우리 아들만한 나이 때 나는 오빠와 설을 보내고 집에 오자마자 얼마나 받았는지 세어보는 게 가장 큰 재미였다. 꼬깃꼬깃한 지폐를 펴서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 새다 보면 항상 오빠는 나보다 몇천 원이 더 많았다. 그것이 속상해서 울면 엄마는 투덜대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 동생하고 똑같이 나누라고 오빠를 설득했다.
나보다 한 살 밖에 많지 않은데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남자란 이유로 더 주시곤 하였다. 특히나 외할머니는 항상 오빠와 나를 차별해서 용돈을 주셨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 말이다. 샘이 많았던 나는 외할머니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점이 미웠다.
"외할머니는 맨날 오빠만 많이 줘."
그러면 엄마는 할머니가 옛날 사람이라 그렇다고 달래주곤 하셨다. 그래도 맨날 간장종지에 밥만 드시던 외할머니는 우리가 가면 꼭 계란찜을 해주셨다.
증조할머니는 항상 오빠와 나에게 세뱃돈을 똑같이 주셨다. 그래서 난 증조할머니가 더 좋았다. 친가는 집성촌에 가까울 정도 근처에 모두 진 씨들이 살았다. 가까운 형제부터 머나먼 친척으로 엮여 있어 명절 때만 한번 뵙는 어른들도 꽤 많았다. 그저 아빠를 따라다니며 세배를 했고, 할머니들은 고쟁이에서 부스럭 소리를 내며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펴서 나이 순서대로 하나씩 나눠주셨다. 큰 아이들은 더러 이삼천 원을 주기도 하고 꼬맹이인 우리들은 하나씩 받고 좋아라 복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어른들이지만 잠깐의 어색함만 이겨내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고 가는 집마다 다과를 내어주시는데 난 어른의 맛처럼 느껴지는 수정과보다 달달한 식혜를 주는 집이 훨씬 좋았다. 동네 슈퍼를 했던 할머니네서 먹고 싶은 과자를 먹고 집에 갈 때 한 봉지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엄마가 하루종일 차례음식을 하고 뒤늦은 식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항상 일찍 가고 작은 엄마들은 왜 늦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설이 되어 맛있는 약과를 먹고 만두를 먹고 세뱃돈을 받는 맛에 심취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흘러 우리 집에서 차례와 제사를 지낼 때 차례상을 차리고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음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종종 시어머니의 시집살이했던 얘기도 들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이다. 어떻게 그 힘든 시집살이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눈물로 보낸 며느리들의 명절맞이를 난 다행히 좋으신 시어머니를 만나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혀 밥을 먹는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해도 주변에 들어보면 아직도 고충이 많은 며느리들이 많다. 우리 아들이 나중에 결혼을 하면 난 어떤 시어머니가 될 것인가 잠깐 생각해 보니 난 옛날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도, 우리 어머님처럼 다 차려놓는 시어머니도 못될 것 같다. 그때의 명절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나저나 우리 아들이 결혼을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