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전문직’의 유통 기한
한때 ‘전문직’이라는 타이틀은 거의 안전자산과 같은 역할을 했어요. 자격증과 시험, 긴 수련 과정을 통과하면 비교적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풍경은 조금 달라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어지고 있어요. 아마존, 메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AI를 중심으로 고용 구조를 재편하는 중입니다. 개발자 취업 붐이 일었던 팬데믹 시절이 불과 5~6년 전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변화는 유난히 빠르게 느껴집니다.
이 변화는 이과생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국내 회계와 세무 법인에서 신입 채용이 크게 줄어들고 있어요. 점점 늘어나는 ‘미채용 합격생’ 비율은 전문성을 쌓을 첫 단추를 끼울 수 없는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 ‘전문직은 견고하다’는 믿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에 기대하는 것
한국에서 전문직이라고 하면 흔히 ‘사’ 자 직업을 떠올려요. 의사, 판사, 세무사, 회계사 등 자격을 갖춰야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직업들이에요. 긴 시간 경험을 축적해 나가고, 그렇게 형성된 권위는 곧 신뢰가 됩니다.
그런데, 전문가는 반드시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특정 학문, 기술, 예술 등 한 분야에서 깊은 숙련을 쌓은 사람 역시 ‘전문가(Specialist)’라고 불러요. 교수, 공예가, 개발자처럼요. 이들에 대한 선망은 꽤 널리 퍼져있어요. 안정적인 고소득, 역할의 필수성, 경험에 기반한 해결 능력 등 전문성이 곧 생존 능력으로 비치고요.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요. AI가 전문 지식을 확산하며 정보의 비대칭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주니어 레벨이 맡는 반복 업무를 쉽게 자동화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더 이상 무조건적인 안전지대는 아닐 것 같아요. 게다가 특정 직업군으로 쏠리는 현상은 과잉 공급과 경쟁 심화로 이어져, 오히려 불안정성을 키우는 아이러니가 벌어집니다. 변화에 민감하고 비교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더욱 선명한 현상이고요.
전문가 반대편에 서 있는 이름
한 직무나 직업을 파고드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넓은 의미의 전문가라면, 그 반대편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있습니다.
제너럴리스트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아요.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조율하고, 사람을 연결하고, 문제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조직에서 직책이 높아질수록 강조하는 융합적 사고와 관리 능력도 제너럴리스트 특징에 가까워요. 최근 서울대학교, 카이스트 등 여러 대학 내에서 융합 연구와 통합 과정을 확대하는 이유도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점은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가 서로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깊이와 넓이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죠.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생각만큼 견고한 벽이 놓여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어디에 더 가까운가
진로를 고민할 때 우리는 종종 연봉, 전망, 합격률 등 사회적 수요부터 계산합니다. 그렇지만, 진짜 나에게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선택지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할 때 나타나요.
‘나는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인가’
심리학에서는 기질을 비교적 타고난 성향으로 바라봅니다. 이건 쉽게 바뀌지 않죠.
예를 들어 자극 추구 성향이 높은 사람은 다양한 경험과 즉각적인 피드백에서 동기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요. 현장에서 빠르게 배우고 움직이는 일이 잘 맞을 수 있죠. 반대로, 인내력과 위험회피 성향을 가진 사람은 오랜 시간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구조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아요.
어느 쪽이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기준 속에서 달리다 보면 마치 하나의 길만이 정답인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력은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흐르는 과정에 가까워서 어느 한 시점에는 깊이를, 다른 시점에는 넓이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요.
그 방향을 바꾸기에 늦은 때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오래 붙들고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아플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