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부터
동양인이 많지 않은 학교였지만, 나는 점점 적응해갔고, 어느 순간부터 영어로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하자면, 도착한 지 6개월쯤 지나면서부터 영어가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다.
나는 원래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라 정말 친한 친구 앞에서만 말을 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틀릴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던 것 같다.
‘내가 틀리면 사람들이 웃겠지…?’
이런 생각이 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금은 영어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어서 매일 말을 엄청 많이 하고, 문법이 틀리든 말든 일단 고민 없이 말부터 뱉고 본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틀리는 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미국 친구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편이었는데, 창작보다는 따라 그리는 걸 아주 잘했다.
당시 포켓몬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라, 뒷자리에 앉은 Sean이라는 남자아이를 위해 집에서 정성껏 피카츄를 그려서 색칠까지 해 다음 날 가져다주었다.
그 친구는 그림을 받자마자
“Wow~~~ Thank you! Wow~~~”
하며 너무 기뻐했고, 그걸 본 옆 친구들도 하나씩 그려달라고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하나씩 그림을 그려주며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미국 학생들은 대개 코넬식 낱장 노트를 바인더에 끼워 다니는데, 그 바인더에는 필통도 달려 있고, 투명 커버 안에는 연예인 사진이나 그림을 넣고 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느새 친구들의 바인더 커버 속 그림들이 내 그림으로 하나씩 바뀌어 갔다.
나는 점점 의기양양해졌고, 학교 가는 게 즐거워졌다.
가끔은 한국말도 알려주곤 했는데, 욕이라 해봤자 “바보” 같은 귀여운 말이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물으면, 장난으로 “바보”라고 알려줬다.
그러면 어떤 친구는 진심으로 “I’m 바보~!” 하면서 다니기도 했다.ㅎㅎ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때 러시아워 2라는 영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성룡과 크리스 터커가 주연이었는데, 성룡은 스페셜 에이전트 역할로 크리스 터커와 함께 팀을 이뤄 범인을 소탕하는 내용이었다.
영화 초반, 성룡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 설정이었고
그래서 크리스 터커와 바디랭귀지로 엉뚱하게 작전을 짜기도 했다. 그때 크리스 터커가 성룡을 무시하듯 던졌던 유명한 대사가 있다.
“Do you understand the words that are coming out of my mouth?”
(“내가 하는 말 알아듣기는 하냐?”)
그 대사를 어느 날, 내가 8학년 때 Technology 수업을듣던 중, 흑인 남자아이 한 명이 나를 보며 똑같이 따라 했다. 놀리는 투로, 웃으면서 내 앞에서 그대로 그 말을 던졌다.
나는 너무 당황하고 속상했다.
그 순간, 교실 안의 공기까지 기억난다.
모든 아이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웃었고 그 시선, 그 분위기, 그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던 나. 말도 잘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속으로만 울컥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