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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Sep 07. 2021

예술가의 이중성

예술가가 될 수 있으려면?


예술가가 되려는 작가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려움들이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들을 보충하고

부양하는 욕망들이 나란히 존재한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경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 조바심 내거나 반대로 자기도취 내지 최면상태에 빠지게 된다. 작업을 열심히 해서 양적으로 쌓아나가는

것이 지름길처럼 여겨진다. 무명일지라도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다 보면 예술가라는 지위가 어느 순간

보상으로 주어지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작품을 계속해나간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아무런 난관도 모르고 작품을 진행하는 순진한 정열이 용기와 결합하면 어린아이처럼

작업을 즐길 수도 있다. 때론 심적 고통까지 모두 감당하고 극복해 가면서 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힘을 얻는다. 물론 생활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이런 열정을 얼마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본질적인 예비활동인 감수성은 살아있는가?


예술가의 고양된 자의식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예술작품에 구현된 의미와 개성은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예술 문제와 기타 모든 문제 사이의 간극은 지극히 좁았다. 장식품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고, 마음속에 비슷한 탄복의 감정을 환기시켜 주어서 좋게 평가되었다. 교회의 건축이나 제단화, 성상으로부터 가정용품에 이르는 예술가( 장인)의 작품을 대중 모두가 누리고 감상했다. 과거 한옥과 같은

주택에서 대부분 민화를 벽에 붙이고 문인화를 족자와 병풍으로 지니고 살았다. 아파트 건설 붐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액자 형식으로 바뀐 그림은 예외 없이 거실 벽이나 식탁 근처에 한두 작품씩 걸려 있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예술의 문제는 광범한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소수의 취향을 가진  비평가, 아니면

오로지 예술가들의 관심으로만 남겨졌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주제나 일상적인

관심으로부터 단절된 채 자신 안의 문제에 대해 집중해 버린 결과이기도 하다. 예술의 가치를 높이 사고

예술가를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존중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도 모호해졌고

대중예술에 밀려서 예술가 스스로도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다.  

사회는 예술가 없이도 잘 굴러가고 이미지와 눈요깃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나도 그림을 그리지만

시각 예술에 대한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다.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거나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진 경우를 제외하고 전시장을 찾는 발길이 드문 이유다. 이제 과거보다 훨씬 더 작가가 되기 위해 외롭게 자신과 싸워나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예술가라는 지위를 얻기까지 자의식을 고양시키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다.


모든 예술의 본질적인 활동은 인간의 경험과 생각, 감각적 자료를 이지적으로 질서 잡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행동에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뒤따른다. 예술가의 고유한 영역은 주제를 예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주어진 물적 자료를 택해서 지각할 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질서, 즉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의 본질은 물적 자료 안에 응집력이 강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단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의 본질을 묻고 스스로 답을 추구하지 않으면 작품 활동을 밀고 나가기 어렵다. 예술가가 창작을 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보다 왜 예술가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화려해 보이는 테크닉에는 한계가 있다.

자신만의 주제의식과 진정성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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