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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Sep 13. 2021

목숨을 건 예술과 사랑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무크

“그림은 정신이 보는 것을 눈의 즐거움을 위해 재현한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눈을 통해 세상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며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가 페르시아 세밀 화가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게 된 이유일 것이다. 건축을 전공하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글쓰기에만 주력했다. 그가 나중에 깨달았듯이 아버지가 품었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이 결실을 본 것 같다.

이 소설은 무자비한 삶의 단면과 가련하고 슬픈 어둠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인생을 직시하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형태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400여 년 전 사라진 옛 세계의 아름다움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과거의 전통적인 세밀화에 대한 관심과 화가들의 삶을 소재로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했다. 처음에 이야기를 시작할 때, 죽은 자가 말을 한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의 궁정 화원 소속의

장인들 사이의 갈등과 불안, 살인범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띠는 것 같지만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다.

절세미인 세큐레는 작가의 말만 듣고도 사랑하게 만드는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4년째 페르시아와의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두 아들과 친정집에서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사랑해

 주인공 카라가 12 만에 돌아와 술탄의 명령으로 일생을 세밀화에 바친 금박 세공사의 살인범을 

찾으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세큐레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카라에게 세밀화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갈 밀서(密書) 제작을 완성해야 하는 

임무도 사랑만큼 중요하다.

수년 전 궁정화가인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시테는 유럽여행을 통해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이끌고 작업하는 세밀화가들 사이에 화풍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신성모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발생한다. 위대한 거장 바흐자드가 <휘스레브와 쉐린>을 그린 삽화에 서명을 남기지 않은

이유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스타일에 변형을 가하거나 개인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것은 왜 일까? 똑같은 소재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화가의 숨겨진 감수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세상의 풍성함과 그것을 창조한 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빛깔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을 의식한다면 예술가적 천재성이나 대가적 노련함이란 것도 전혀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된다. 작가의 열망대로 완벽한 그림처럼 보일지라도, 신 앞에선 인간의 부끄러움과 고뇌로부터 나온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인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밀 화가들의 희생이 이어지고 카라의 스승이요 이모부인 에니시테도 살해당하고 만다. 세밀화가의

그림이 책의 내용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본 유럽의 초상화는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그렸고, 그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책을 위한 그림 속에 자신의 신념과 기예 같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 에니시테의 근대적 자아, ‘나’라는 개인의 주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위험한 것이

된다. 시대정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인가? 화가들 사이에서도 이해관계에 얽히고 자기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성을 피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성취와 욕망을 채우려는 권력의 속성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념과 생각의 차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이라서 안타깝다.


소설의 배경이 된 세계, 과거에는 모든 아름다움이 신의 것이었다. 장인 세밀화가의 기예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신에 대한 사랑은 그가 본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술을 향한 모든

고통을 희열의 승리로 바꾸는 화가의 일생은 구도자에 가깝다. 이슬람의 옛 화가들은 높은 곳에서 마치

신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대상을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묘사했다. 반면 르네상스 시기부터

발전한 서양의 원근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공간을 파악하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문명 간의 충돌과 얽힘은 피할 수 없었다.

이슬람 회화의 전통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흐름은 패배감과 슬픈 분위기로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오르한 파무크의 세밀 화가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기에 결국은 장님이 되기까지 창작에 모든

땀과 열정을 쏟아붓는 페르시아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빛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삶과 이야기가

정말 생생하고 그 내면세계까지 잘 드러나 있어서 몰입이 잘 되는 책이다. 작가가 상상한 색다른 세계를

우리가 보고 행복해지기에 충분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일독을 권한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명규원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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