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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Sep 23. 2021

쓰디쓴 맛

먹는 일과 옳은 것을 추구하는 일

 

'무엇을 먹을까?'

'뭘 해야 식구들이 잘 먹을까?'

우리는 즐거움과 기대, 혹은 걱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확실히 사람은

먹으려고 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먹는 일은 중요하다. 아들 녀석은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나 치킨을

비롯한 맛있는 것을 골라 먹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루에 한 끼라도

소홀히 대충 넘어갈 수 없다.

우리가 화장이 잘 먹는다, 물감이 잘 먹는다, 말이 잘 먹어 들어가지 않는다, 귀가 먹었다, 일등을 먹었다, 두 골을 먹다, 그렇게 할 마음을 먹다, 아홉 살 먹은 아이, 깜박 잊어먹다, 욕을 먹다 등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된 상태를 나타낼 때 ‘먹다’라는 말을 잘 쓴다.


생명의 양식이 담겼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펼쳐지지 않는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성구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구원’이라는 말만큼 ‘먹다’는 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도 ‘먹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 ···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기 2장 16-17절>

하느님이 에덴에 동산을 만들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아담으로 하여금 청지기와 같이 돌보게 하며 명령하셨다. 사람의 생각과 

지혜가 깊더라도 궁극적으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된 존재다. 그런 자신을 돌아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인식하거나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지 못할 때 권력자들에 의한 광기와 악이 활개 친다. 그래서 법을 따라 처벌하더라도 선악의 기준을 더 높은 존재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족속이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40년간 광야의 유랑 생활을 할 

때도 ‘먹는’ 문제가 중요했다. 그들은 비같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먹을 것’과 

먹지 말 것’(깨끗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구별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먹는 일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유다)의 멸망을 증언해야 할 소명을 받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따르는 고통과 

어려움을 처절하게 토로(吐露) 하였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로서 일찍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절실히 깨닫고도 

그 소명을 피하려 했으며,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자신이 태어난 날과 그때부터 갖게 된 고통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죽어서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의 직무를 결코 포기할 수없었던 

것은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그에게 기쁨이었고 마음의 즐거움이었다. 또한 그의 

뼛속에 갇혀있는 불과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과 

흔들림, 외적인 위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단 한마디도 어김없이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먹게 된 하느님의 말씀은 “달고 오묘한”맛이 아니다. 다가오는 재난과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내다보면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픔을 느끼며 통곡하게 만드는 참으로 쓰디쓴 맛이었다.


우리 속담에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고 했는데, 예레미야는 지도급 사람들은 

물론 고향 아나돗 시민들까지 배척하고 죽이려 들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서 진실을 외쳤다. 즉 야훼께서 

다윗 계열과 지상의 통치 보좌로서 선택했던 성전을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에 안주해서 지도자들이나 

백성들도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교리로서 경직화된 확신에 

대해 예레미야는 그것을 뒤엎는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이 시대에 예레미야가 있다면 어떨까? 거짓 선동가들이 판치는 세상이라 그가 와치는 진실에 귀 기울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역시나 국가를 염려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쓰디쓴 쓴맛을 보고 또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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