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알파고의 공포가 인공지능학과 1기생을 만들기까지
분류기호 : 379.4 (가정교육) / 370.4 (교육학 - 강연집, 수필, 에세이)
2026년 3월 9일. 알파고 대국이 정확히 10주년을 맞이하던 날, 이세돌 9단이 직접 '새로운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결을 펼쳤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국내 AI 스타트업의 기술을 활용해, 이세돌 9단은 복잡한 컴퓨터 코딩을 단 한 줄도 하지 않고 오직 '음성 명령(말)'만으로 약 30분 만에 수준급의 바둑 AI를 뚝딱 완성해 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10년 전 알파고와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바로 그 호텔에서 즉석 대국을 펼쳤습니다.
결과는 대국 10분 만에 나온 이세돌 9단의 미소 띤 패배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의 진짜 의미는 승패가 아니었습니다.
10년 전이 인간과 기계의 '처절한 승부'였다면, 이번 이벤트는 '인간과 AI의 협업'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세돌 9단은 이제 AI가 두려운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을 높여주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파트너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야흐로 경쟁에서 협력의 시대로 넘어온 것이죠.
이 뉴스를 보며 문득 2016년 3월,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에게 패배했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제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이면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죠.
(하지만 제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그때 저는 아들의 교육보다는 '투자'에 온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을 때라서 당장 별다른 행동을 하진 못했습니다.)
명문대와 포클레인, 부모가 만들어줄 '기본값'에 대하여
그러다 이듬해인 2017년, TV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제 교육관을 철저히 점검하게 만든 강연 하나를 만났습니다. 고려대학교 허태균 교수님의 '대한민국 철수 영희의 심리'라는 강연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두 아들의 가상 사례를 비교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부모가 노후 자금까지 털어 약 2억 원의 사교육을 지원해 명문대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시킵니다.
반면 둘째 아들에게는 지원해 줄 돈이 없어진 부모가 빚을 내어 '포클레인 2대'를 사줍니다. 둘째는 직접 포클레인을 몰고, 나머지 1대는 세를 주며 돈을 법니다.
교수님은 맹목적으로 자녀를 '첫째 아들'처럼 키우고 싶어 하는 한국 부모들의 세태를 꼬집으며, 최악의 상황은 "부모가 2억 원을 들여 첫째처럼 스펙을 쌓아주었는데, 결국 취업에 실패하고 뒤늦게 포클레인 기술을 배우러 가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정해진 정답(명문대, 대기업)만 좇다 보니 막대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불행해진다는 심리학적 통찰이었습니다.
강연을 본 후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리 아들을 명문대 코스에 밀어 넣는 것이 맞을까?'
저희 가족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우선 중고등학교 때 사교육비에 큰돈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4화 참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의 회사에서 자녀의 대학 등록금이 전액 지원되기 때문에 학비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는 훌륭한 안전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아들에게 당장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초록색을 유독 좋아해 '지하철 2호선 기관사'가 되고 싶어 했고, 6살 무렵 상위 0.0001%의 공간지각능력을 보이며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여느 아이들처럼 딱히 꿈이 없는 평범한 소년이 되어버렸습니다.
수학 영재원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었음에도 뚜렷한 목표가 없었죠. 중학교 시절엔 코로나 시국을 핑계로 집에서 게임을 즐기며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만화가나 요리사가 되고 싶은데 억지로 명문대 코스를 밟게 하는 것이라면 폭력일 수 있겠지만, 당시 아이는 꿈도 뚜렷한 목표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로서, 아이가 훗날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넓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명문대 진학'이라는 가장 튼튼한 방어막이자 높은 기본값을 목표로 세워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33권의 무기와 AI 시대의 파도
그렇다면 엄마인 제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무조건 공부해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성을 읽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첫사랑 도서관, 정독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2018년 3월부터 4개월 동안 정독도서관과 종로도서관을 오가며 무려 60권의 책을 파고들었습니다. 그중 오로지 아들의 미래 교육을 위해 정독한 책만 33권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읽은 도서 목록을 정리하다가 이세돌 9단의 "AI와 협업하라"는 말이 떠올라 6페이지 분량의 텍스트를 제 책사인 AI '제미나이'에게 툭 던져보았습니다. 단 몇 초 만에 완벽하고 예쁜 엑셀 파일로 뚝딱 정리해 주더군요. 일상에 스며든 AI의 힘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33권의 미래 교육서를 씹어 먹고 제가 내린 단단한 결론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학교의 간판보다 본인의 뜻을 존중한다.
아들은 학비 부담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으므로 일단 진학시킨다.
단,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 강요하지 않으며,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입학 후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해도 그 뜻을 존중한다.
둘째, 융합 학문에 초점을 맞춘다.
아이의 성향이 이과와 문과의 중간이므로 융합 학문을 목표로 한다.
산업공학과나 통계학과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되, 이과의 수학과나 물리학과, 문과의 철학과나 심리학과도 염두에 둔다.
셋째, 가장 넓은 선택지를 위해 명문대를 목표로 한다.
기왕 대학에 가기로 결정했다면, 훗날 아이가 무엇을 하든 유리한 기본값을 쥘 수 있도록 명문대를 목표로 한다.
이 뚜렷한 로드맵이 서자 신기하게도 아이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아들 본인도 명문대에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그려둔 융합 학문의 스케치북 위에서,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통계학과'를 스스로 선택해 목표를 세웠고, 치열하게 학생부를 채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고2 무렵, 기가 막힌 타이밍에 대학들마다 '인공지능(AI)'과 관련된 학과들이 신설되기 시작했습니다.
통계를 파고들던 아들의 방향성과 AI 시대의 요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죠.
그렇게 아들은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고려대학교 인공지능학과의 '1기 입학생'이 되었습니다.
노는 게 제일 좋고 꿈이 없던 평범한 소년은, 어느덧 자신이 선택한 인공지능학과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며 즐거운 대학교 2학년 생활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아들 옆에서 요즘 트렌드에 발맞춰 열심히 '인공지능'을 공부하며 협업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고요.
10년 전 알파고의 등장에 두려워 떨던 저는, 도서관의 책 33권을 무기 삼아 흔들림 없는 전략을 세웠고, 아들은 그 위에서 스스로 핸들을 잡고 시대의 파도에 올라탔습니다.
가계부가 1원 단위로 제 삶을 지켜낸 튼튼한 방패였다면, 그 시절 도서관에서 치열하게 읽어낸 책들은 제 아이의 미래를 뚫어준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