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잘못 보았나? 노안이 와서 모니터를 보면 가끔씩 초점이 흐려질 때가 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난시가 심한 왼쪽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후 다시 쳐다보았다.
“이런 젠장"
무슨 말인들 못하랴. 말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간절히 릴랙스를 찾았지만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갱년기 증상처럼 잠깐 사이 아주 뜨거운 열이 뻗쳐 올랐다. 그나마 옆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왜냐면 시쳇말로 완전 쪽 팔렸다.
매년 3월이면 성과연봉이 책정된다. 지난해 성과를 측정한 결과를 연봉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과등급이 ‘B’였다. 한마디로 남들 8백만 원 받을 때 나는 3백만 원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돈도 돈이지만 완전 저성과자로 낙인이 찍혔으니 자존심이 뭉개졌다.
허둥대면서 담당자 전화번호를 뒤지고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마치 내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편에서 여유로운 낮은음이 들렸다. 하지만 저 짧은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에도 목소리는 떨리고 설명하는 내내 침을 꼴딱 삼키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유는 장황했지만 논리적이지 않았다.
평가의 기준은 세 가지였다. 일 년에 두 번 실시하는 근무성적 평정 중 근무실적 부분 45퍼센트, 전년도 부서 업무평가 45퍼센트, 나머지 10퍼센트가 기관장 평가(시장, 부시장)로 이루어져 있다. 업무평가가 성과급 결정에 중요한 변수이기에 거의 모든 부서장급들이 평가항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조바심을 내며 한 해를 보냈다.
마침 운이 따랐는지 연말 부서평가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은근히 나의 성과등급에 대한 기대도 높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B등급’이라니. 그것도 거의 바닥 순위, 여차하면 한 푼도 받지 못하는 ‘C등급’으로 전락할 뻔했다고도 한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 부서 업무평가는 뭐하러 하는 건가요? 호전적인 질문에 담당자는 대답을 못했다.
뭐가 문제인가요?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평가표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판단할 수 없지만 성과급의 취지를 들먹이며 사장된 부서평가의 결과를 꺼내 들었다. 담당자는 점점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들만 되풀이하더니 답변이 궁했는지 다른 평가항목에서 점수를 못 받았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업무평가 점수가 높았지만 다른 두 개의 점수, 근무평정에 산정된 실적 점수와 기관장 점수를 받지 못해서 하위권으로 떨어진 거라는 얘기다. 옳거니, 그럼 결국은 대놓고 차별한 것은 아니지만 공정함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거다.
연말 업무평가는 투명하고 공정한 평가를 위해 외부 민간인이 섞여 있다. 그래서 결과를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어렵다. 하나 근무평정이나 기관장은 평가는 순전한 내부 간부들 소관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업무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평가대상 중 나는 유일한 여성이고 비교적 나이도 적었다. 이런 불길한 느낌은 경험에서 오는 익숙함이다. 당연히 ‘B등급’은 처음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내가 술밥을 안 사줘서 그랬나 보네.’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다음날 이의 신청서를 제출했다. 평가의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점수별 편차 배분에 대한 불합리성, 혹여라도 여성 부서장에 대한 차별 여부, 지난해 부서평가 결과 통보 공문까지 세 장을 꽉 채워 담당자 이메일로 보냈다. 곧이어 인사팀장의 전화가 왔다. 첫마디는 위로였지만 그다음 문장은 ‘뭐하러 그러세요?’였다.
성과등급 결정 후 이의신청을 하면 성과급 심사위원회를 통해 재심사를 한다. 심사과정에서 상위등급으로 바뀌면 예산을 고려하여 추가 지급을 하게 되어 있다. 지급 지침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여태까지 성과연봉을 지급하면서 이의신청을 받아 변경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고 했다.
인사팀장은 아쉬운 결과지만 어쩌겠냐고. 이미지를 생각해서 참고 견디는 것이 낫지 않냐는 속상한 내 마음을 위로했지만 실상은 노련한 회유책이었다. ‘항상 이러지는 않겠지요.’라고 했지만 좀 더 팩트를 체크한다면, ‘여태 그래 왔는데 뭘 새삼스럽게’가 맞았다.
지금까지 중요한 명단에서 한 자릿수 순위에 오른 적이 거의 없다. 늘 멀찌감치 밀려있었다. 어쩌다 행운을 잡는 기회가 있는데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면서 뒷순위의 나까지 차례가 오는 것이다. 급한 마음에 버스표를 샀지만 이미 매진 상태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누군가 버스에서 내리게 되고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가 마지못해 올라 타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내 차지가 되는 경우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