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읽는 신문의 한 귀퉁이에 추천도서 칼럼이 있다. 대부분 유명한 학자, 교수, 리더들이 읽었음직한 것들이었다. 누가 소개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짧은 제목과 약간 올드한 느낌에 흥미가 생겼다. 바로 인터넷을 뒤져 대강의 줄거리를 읽고 다음 회차 독서 동아리에 의견을 올렸다. 여섯 명의 동아리 회원 중 과반수(3명)의 선택으로 11월 도서로 선정되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이었다. 소설답게 술술 잘 넘어간 덕택에 11월 마지막 이틀을 남겨두고 완독 했다. 책 표지에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가 선택한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그들이 감동했다고 나도 감동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라는 반문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주인공 타라가 일곱 살부터 서른 살 정도까지의 성장과정을 글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 저자는 이 글이 모르몬 주의에 대한 것도, 어떤 다른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책을 덮으면서 그녀 부모의 종교관, 생각, 신념, 때로는 자녀를 사랑하는 방식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 엄마의 허브를 이용한 자연요법이나 자연 분만을 돕는 산파 일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나머지 일반적인 학교를 통한 자녀교육을 거부하는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게다가 엄마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들이 엉뚱하고 이상했다. 될 듯 말 듯한 화해의 접점이 어긋날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졌다.
타라는 1986년생이다. 요즘 여성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누구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 굳이 전화를 쓰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첨단 문명이 살아 숨시는 시대, 그런 일들을,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 최고의 강대국이라는 나라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홈스쿨링이 시도되고 있고 유럽이나 미국, 호주 같은 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부모들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지적 수준이 높다고 들었다. 아이들을 직접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인격적으로 아이를 존중하는 가정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유가 공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 즉 아이를 배려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타라의 부모가 시행한 홈스쿨링은 기계화되는 사회변화를 비난하면서 생계를 위해 폐철 수집을 가족 경영체제로 운영하는 형태를 띤다. 그 와중에 소중한 아들과 딸이 위험에 처해지는 순간이 오지만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치유를 선택한다. 시간이 흘러 몸에 난 상처는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를 아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라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깨닫기 시작한 가족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진정한 용서와 사과를 꿈꾸게 한다. 그러나 500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가 바라는 가족사의 훈훈한 장면, 과거의 잘못을 되짚고 상처를 보듬는 모습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생각이 현격하게 차이나는 가족끼리 분열된 채 다른 먼 나라 사람처럼 지내게 되었다는 조금은 씁쓸한 결말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398쪽과 399쪽 사이에 있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첫 번째가 소극적 자유로 외부적 장애와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 개인은 행동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방해받지 않는 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극적 자유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 스스로를 스스로가 다스린다는 의미다. 교수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적극적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비이성적 두려움이나 믿음, 중독, 미신을 비롯한 형태의 자기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이다. 타라의 부모는 자신들을 비롯하여 자녀들에게 소극적 자유를 부여하며 살았다. 물론 공교육을 피하는 이유가 인간이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정해놓은 범주안에 가둬놓기 위한 이유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싶다. 적극적 자유를 갖게 되면 그들의 자녀들은 반드시 품을 떠나 먼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을 원했다. 바깥사람들과 최소한의 접촉만을 허락하고 나머지는 인디언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산의 보호 아래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기를 원했다. 마치 인디언들처럼.
결국 자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타라와 리처드, 타일러 등 일곱 남매 중 3명은 적극적 자유를 실천하기 모험을 감행했고 그들은 부모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에 타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자아, 그것을 교육이라고 정의했다.
‘자유’란 무엇일까? 나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인가? 물론 직장인이기 때문에 출근과 퇴근 사이, 가끔은 퇴근 후에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마음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