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캐리어가 6개, 각자 배낭을 메고, 아이는 새로운 학교에서 배울 자기 몸만 한 바이올린을 맸다.
인천 공항 가는길
8살 아이에게까지 할당된 캐리어 두 개는 나중에는 결국 부모 몫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만큼의 짐을 더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더 가져오지 못한 게 아쉽기까지 하다.
나는 한국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동안의 육아에 쏟았던 에너지가 바닥나서인지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우연히 시작한 꽃꽂이가 그 우울감을 채워주면서 어쩌면 꽃으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겠다는 용기가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남편은 중국 주재원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고 딸에게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국제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자연스레 접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꽃을 포기하고 중국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이곳은 수조, 중국어로는 쑤저우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는 10년 전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의 삶도 경험했기에 장점과 단점 그 어느 중간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중국행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생각보다는 너무 많이, 훨씬 많이 힘들었다. 아.. 정말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앞사람들을 따라서 공사장같이 통로 빼고 다 막아놓은 공항을 줄줄이 통과하며 적으라면 적고 스캔하라면 하고 검사하라면 하고 그렇게 끝없는 기다림에 중국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우리는 코로나 검사를 포함한 모든 프로세스를 거친 후 몇 시간 만에야 화장실도 갈 수 있었고 그들은 우리의 여권까지 가져가 버렸다. 여권을 왜 가져갔냐고? 격리시설로 이동한 다음에 우리 신분을 다시 확인하고 돌려줬는데 아마 중간에 튈까 봐 그런 게 아닌가 혼자 생각했다.
첫 격리시설로 가는 버스
밤이 다 되어 한 시간을 달려 격리시설로 도착해서는 식기세척기에 들어간 접시들처럼 우리의 모든 짐들은 소독약 스프레이에 소독되었다. 심지어 바이올린까지... 그 순간 내가 메고 간 가방이 단 돈 몇만 원짜리 잔스포츠였다는 것에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자, 이제 소독약으로 하얗고 축축하게 변한 가방들을 끌고 아이와 나는 함께, 남편은 분리되어 방으로 넣어졌다. 밤 10시 30분. 오늘은 일단 쉬자~고 하고 침대에 눕고 싶었으나, 방은 너무 추웠고 도와줄 직원도 오지 않았으며 우리는 아침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너무 배가 고팠다. 외투까지 다 껴입은 채 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지우며 컵라면을 욱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