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ching in not a job. It's a lifestyle. It permeates your whole life. -Jill Biden-
내 나이 스물셋이란 나이에 선생님이 되었다. 생일이 빠른 년 생이라 학교도 한 살 일찍 들어갔고, 수능을 기대만큼 잘 보진 못했지만 재수하기는 싫었다. 결국 장학금 혜택이 많은 지방에 있는 교대로 진학을 결정했다. 서울이 고향인 나에게 지방교대는 그야말로 시골 중 시골이었다. 나의 목표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꿈에 그리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기에 대학을 다니는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4학년 때는 본격적인 임용고사 준비로 항상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나의 대학교 4학년 시절, 1998년 국회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사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단축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2만여 명의 교사가 퇴직했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퇴직자들로 인해 곧 교사 부족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99년 2월 교대 졸업생들은 마치 무료로 버스에 환승하듯 졸업을 하자마자 대부분 3월 1일 자로 발령을 받았다. 물론 임용고사를 절차에 맞게 다 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엔간하면 모두 합격을 했다.
선생님이 된 내 나이는꽃다운 나이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고 꿈의 직업인 선생님이 되었던 99년 3월 초, 처음 학교로 출근하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아침 일찍 교무실에서 배정받은 학년과 반은 5학년 2반. 미리 배정 학년을 알려주었더라면 수업 준비도 미리 하고 좋았을 텐데 그 시절에는 출근 첫날 배정반을 알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4층에 위치한 우리 반으로 향하는 계단 길 내내 내 심장 소리가 쿵쾅거렸다. 시끌벅적했던 교실은 내가 문을 열자마자 일시에 조용해졌다. "안녕? 얘들아!" 존댓말로 인사할까, 반말로 인사할까 고민하다가 반말을 선택했다. 나름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나는 분필을 잡고 칠판에 커다란 배를 그리고는 그 안에 졸라맨? 같은 사람들을 열심히 그렸다.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우리는 1년 동안 한 배를 탔어요. 서로 힘을 합치고 도우면서 1년을 보내야 해요." 어떻게 시작의 포문을 열 지 한참을 고민 끝에 탄생한 그림과 멘트였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였을 법도 했던 그 시절,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은 종종 편치 않았다. 교실 안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 큰 행복을 느꼈지만 교실 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교사 수급 부족으로 교육정책은 늘 오락가락했고, 승진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몇몇 선배 선생님들의 모습은 내게 큰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교직은 내게 꿈의 직장이었는데, 선생님은 내게 꿈의 직업이었는데, 하루하루 교직생활이 힘들어질 무렵 나는 대학원 진학이라는 탈출구를 만들었고 이후 이어진 대학원 생활은 9년간 지속되었다.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의 나는 교사로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교직 경력이 7~8년 정도 쌓이고 나니 초등학교에서 수업하는 것도 꽤 익숙해졌고 학년별 아이들의 특성도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도전이 내게 찾아왔다. 박사과정 2년 차 때였던 2006년, 아는 선배님이 갑작스레 일이 생겨 '교사론'이라는 과목의 대학 강의를 내게 부탁한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야간 수업이라 충분히 할 수 있다며 건네신 제안.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대학 수업을 해 볼까 싶어서 도전하기로 했다.
대학교 수업을 처음 맡게 된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나이 서른에 불과했다. 맡은 수업은 교직과목이라 40명이 교실에 꽉 차 있었다. 기술교육과 전공생들이었던 탓에 대부분이 남학생이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군필자로 스물다섯에서 서른 초반까지, 알고 보니 내 또래였고 나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여중고에 교대, 거의 여자들과 함께한 나의 학창 시절, 초등학교도 여초 직장. 남학생들 눈동자가 나만 바라보는 첫 대학 수업이 얼마나 부담스럽던지... 등에서는 땀이 흘렀고 수업이 끝났을 때 "휴~" 한숨이 나왔다.
그 후로부터 일요일은 그 주에 있을 대학 수업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나갔지만 가르침의 기회는 곧 배움의 기회였다. 교사론이라는 과목의 특성상 나 스스로도 공부를 참 많이 하게 되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나이가 비슷한 초보 대학 강사의 수업이었음에도 40명의 대학생들 모두 열심히 수업에 임해 주어 늘 고마웠다. 강의가 모두 끝나고 강의평가의 내용도 '신선한 수업, 알찬 수업'이었다는 긍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더 보람이 있었다.
한국에서 있는 동안 초등학교에서 18년 동안 수업을 했고, 대학교에서는 약 10년에 걸쳐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방학에는1~2주 정도씩수업을 했다. 경험은 내게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에 온 이후에도 비록 영어가 나를 가로막을지언정,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오히려 설렌달까? 나는 요즘에도 미국의 학교에서 한국에 대한 수업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자원해서 수업을 해 주고 있다. 자원봉사와 재능 기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날들. 가르침은 곧 배움이요, 수업은 내 삶의 활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