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돌봐 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 일이 시작된 건, 생각해 보면 녀석이 아주 어렸던 때였다. 대부분의 네 살 베기 사내 녀석들이 그렇듯 로봇이나 자동차, 혹은 인형까지 두루두루 가지고 놀던 그 시기. 녀석이 한참 머리가 깨고 있던 때라서 이런저런 장난감들에 인격을 부여하며 놀이를 해주곤 했었는데, 아마도 그때의 일이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느 날 저녁, 녀석이 또 고집을 피우며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아이를 달래고 윽박도 지르며 실랑이를 하던 중, 내 눈에 띈 건 내 책상 아래에 있던 복합기 프린터였다. 상태에 대한 표시를 각종 색깔을 내며 움직이는 불빛으로 나타내는 제품이었는데, 그날따라 뭔가 연결에 오류가 있었던 지 경고성의 샛노란 불빛을 깜빡이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거다 싶어 녀석에게 외쳤다.
“저것 좀 봐! 네가 고집 피우니까 컴퓨터가 화를 내고 있잖아.”
녀석은 갑자기 울음과 떼를 뚝 그치고 내가 가리키는 프린터를 쳐다봤다. 그리곤 약간 겁에 질린 얼굴로 그 깜빡이는 불빛을 한참 보고 있었다.
“컴퓨터가 화 내?”
“그래. 저 컴퓨터는 아빠 건데, 네가 아빠한테 이렇게 하니까 컴퓨터가 그러지 말라고 화내는 거야.”
녀석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이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서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나는 녀석을 재우려고 안고 토닥이며 안심을 시켜주려고 애썼다. 녀석이 물었다.
“아빠 컴퓨터가 아직도 화 내?”
“아니야, 아빠가 이제 가서 잘 얘기할게.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괜찮다고, 이제 안 그런다고 했다고 잘 얘기할게. 그럼 괜찮아질 거야.”
녀석은 약간 슬픈 얼굴이었지만, 다행히 내 말에 수긍하는 듯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잘 눕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서둘러 내 방으로 향했다. 녀석에게 해준 이야기와 말을 맞추려면 뭔가 해야 했다. 프린터가 무섭게 깜빡이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행히 무선 연결 설정을 수정해서 정상으로 변경하고 나니 불빛은 하얗고 차분하게 바뀌었다. 마치 예전에 자동차에 인격이 있었던 ‘키트’ 같다고 잠시 생각하곤 혼자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녀석은 잠에서 깨자마자 ‘아빠 컴퓨터’의 기분을 확인하러 갔다. 어제의 화가 난 모습이 아닌 평온한 하얀색 불빛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녀석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아빠 컴퓨터가 이제 괜찮대?”
“응. 아빠가 잘 말했어. 봤지?”
그날 이후로 녀석은 컴퓨터와 로봇에 정말 인격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렇게 유아기를 지나면 이치를 깨닫고 ‘정상적인’ 성장기의 아이로 커가겠지…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후로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녀석은 그 뒤로 로봇과 컴퓨터, AI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기 시작했고 중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된 현재는 벌써 상당히 깊은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어릴 적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던 인격을 가진 컴퓨터가 상용화된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 중심에 녀석이 있었다. 문제는, 인공지능에 인격을 부여하는 그 일에 정말로 녀석이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불안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봐 왔던 그 수많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 문제, 도덕성 문제 등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내 아들이라는 것도 그랬다.
“난 그저 네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네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걸로 충분한데, 넌 이미 내 걱정보다 커 버렸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녀석과 매일 화상으로 통화를 하지만, 가까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헤드락을 걸어본 지 꽤 된 것 같았다. 책상 앞에 앉아 오래되어 보이는 내 프린터에 손을 올리고 톡톡 두드렸다. 옛날 생각이 나서 좋았다. 불빛이 움직이며 반응하는 게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도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사실 그 프린터는 아들이 나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만들어 준 것이었다. 프린터 모양 로봇이었다. 평소엔 인공지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때문에 말은 하지 않도록 명령해 놓았었다.
“내가 잘 돌봐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