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1년 전쯤 들어온 동백 화분이 있다.
동백은 선명하고 찐한 잎의 색깔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크게 피는 잎이 참 매혹적인 꽃이다.
물론 그리고 내 고향인 부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꽃이라 나는 동백나무를 좋아한다.
거실 창가에 둔 동백나무는 작지만 강하게 존재를 내뿜었다.
나는 고귀하고 우아한 존재이니 언제고 때가 되면 짠하고 꽃을 내보일 테다 그때까지 여기서 잘 버터 보자는 식으로 봄 여름 가을을 보낸다.
나는 그런 동백나무가 좋았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도 청소를 할 때도
거실에서 티브이를 볼 때도 동백나무를 보면서 흐뭇했고,
나름의 꽃부심을 뿜뿜 내뿜는듯한 동백나무를 나는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창가에 두고 아끼며 돌보았다.
잎을 주기적으로 닦아주는 것은 물론 우리 집 쌀뜨물은 늘 동백나무 몫이었다.
그해 동백나무는 내 정성에 응답이라도 한 듯 작은 나무에 꽃눈이 참 많이도 맺혔다.
12월, 1월, 2월. 3월..
그런데 동백꽃은 꽃봉오리만 열심히 만들고 봉오리 끝에만 조그맣게 빨간 물을 들이더니 피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피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를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피지 못하고 뭉쳐있던 꽃잎은 참 부드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몇 달 동안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도 못했다.
동백나무는 5도 내외의 저온 처리가 되어야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직후다.
거실 베란다가 확장된 우리 집은 중앙난방으로 창가도 따뜻한 편이었고,
꽃이 피기에는 12월 1월 2월 3월이 동백꽃에겐 과하게 따뜻한 곳이었던 거다.
난방이 되지 않은 우리 집안의 유일한 공간은 확장되지 않은 작은방 베란다이다.
분리수거함도 창고도 있는 작은방 베란다는 춥지만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백나무를 두면 내 동선과 눈앞에 늘 있던 동백나무를 쓰레기 재활용이나 창고에 볼일이 있을 때만 볼 수가 있어 아쉽고 허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큰마음을 먹고 동백꽃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후 작은방 베란다에 내놓았다.
물론 쌀뜨물을 동백나무가 제일 먼저 받은 건 여전했다.
작년 겨울부터 내 시아에 있던 동백나무는 내 시야 밖에서 꽃눈을 만들더니 어느 순간 꽃봉오리가 지고 화려한 꽃을 그 추운 데서 만들었다.
나는 너무 기특하고 귀해 요리조리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나는 일하는 엄마였지만 겨울이와 한 몸이었다.
겨울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고
그 아이의 시간 1분 1초가 의미 있는 시간이길 바랐다.
이런 나의 의도는 독이 되어 나를 괴롭히고 겨울이를 괴롭혔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시간을 경험들을 너를 위한다는 핑계로 그 모든 기회를 뺏어버리고 겨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없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다.
겨울이 스스로가 여러 방법으로 온몸으로, 실패하더라고 내가 스스로 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는데 나는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 같다.
내 욕심대로 사랑스러운 아이를 내 품 안에서 잘 키우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시간에 맞춰 결실을 이루길 바랐다.
그런데 겨울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겨울이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겨울이는 스스로를 잘 알았고 스스로의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 12살밖에 안 된 아이를 집에서 200킬로가 넘는 먼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 몰래 울었다.
우리가 같이 의논하고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 아이의 포동한 살과 그 아이의 냄새를 껴안지 못하고 잠드는 시간이 너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안다.
겨울이는 동백꽃처럼 자기만의 시간에 꽃을 피울 거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내 눈앞의 거실이 아니라 지금은 춥고 힘들지만 겨울이에게 필요하고 알맞은 곳에서 겨울이만의 꽃을 피울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동백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