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슬픔이 가르쳐준 것

by 노을책갈피
사람들이 그토록 서투른 말들을 건네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르빌뢰르의 문장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죽음은 너무나도 커다란 상실이자 슬픔이고, 그것을 담기에 언어라는 그릇은 언제나 너무나도 작다.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중에서

나 또한 바야흐로 6년 전, 친정에서 키우던 반려견과 16년을 함께 살다가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윌리'라는 말티츠 품종의 반려견이었는데, 당시 친정엄마가 내성적이고 감정표현에 서툴었던 중학생 나를 위해 직접 분양해 주셨던 것이다.

윌리는 중학생이던 내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출산하고도, 둘째 아이가 3살인 시점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왔던 윌리의 죽음.

죽기 한 달 전부터 윌리는 먹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고, 물 한 모금조차 겨우 마시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그렇게 서서히,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반려견이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주인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 가족은 윌리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가 너무 힘들었다.

'미안해, 함께 더 많은 날을 산책에 동행하지 못해 미안하고, 네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해주지 못해 미안해.'

죽음의 순간, 내 안의 수많은 말들을 삼킨 채 더욱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그 깊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작은 생명체가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남기고 갔는지를.


몇 해 전, 가까운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소중한 존재의 죽음 앞에서 도무지 어떤 말로 위로의 말을 건네야 될지 몰랐다.

수많은 고심 끝에 "언니,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되겠지만, 아버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도할게요."라는 문자를 남긴 적이 있다.

나 역시 죽음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크나큰 슬픔을 겪은 그 언니에게는 나의 말들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이 시키는 말은 전해야 될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슬픔을 담기에는, 언어라는 그릇은 언제나 너무나도 작다"라는 작가의 말에 커다란 공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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