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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을 쓰는 작가 Jul 01. 2024

우리 엄마

친정엄마가 쏘아 올린 아픔


 결혼하고도 친정 근처 도보 5분 거리에 살았던 무뚝뚝한 딸. 그런 딸이지만 결혼 전에도 행여 공부하랴 힘들까 일을 하랴 힘들까, 어차피 결혼하면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을 텐데' 걱정한 탓인지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던 우리 엄마.  
딸이 결혼하고 나서도 손주들을 봐주시는 것은 물론, 예고도 없이 우리 집을 불쑥 찾아와 아침부터 팔팔 끓인 미역국이며 수제 돈가스까지 툭 건네며, 대청소까지 해주시던 우리 엄마. 힘들다고 그만 좀 하라는 딸의 잔소리 따위는 철저히 무시하고 화장실이며 거실이며 온 집 안을 쓱쓱 싹싹 청소하며 구슬땀을 흘리신 우리 엄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드디어 우리네 부부는 경제적 독립을 외치게 되었고, 10년 만에 엄마의 품을 떠나 이사를 하게 됐다. 그래봤자 30분 거리의 같은 부산이지만, 엄마와 도보 5분 거리에 있던 나에게는 아주 큰 결심이자 도전이었다.

근 35년을 엄마에게 평생 기대어 살아왔으니 엄마로부터 나의 심리적 독립이 가장 큰 숙제였으니 말이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각자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새로운 주거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아이들이 새로운 교육 환경에 발 들이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정보를 캐내기 바빴다. 그런 사이 친정엄마는 서서히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매일 보던 손주와 딸네 가족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느낌이었을까. 극심한 외로움과 상실감의 고통으로 힘드셨던 것일까. 빈 둥지 증후군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눈빛도 어느새 초점 없이 "집 안에 있으니 땅이 무너지니 밖을 나가야 한다",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어떤 날은 꼭두새벽부터 아빠의 호출이 이어졌다. "내 힘으로는 엄마를 도저히 못 말리겠다. 너네가 좀 와야겠다."는 다급한 아빠의 목소리. 그렇게 강한 모습만 보이던 아빠가 한없이 약해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쳤을까. 우리 부부는 곧장 친정으로 향한다.
엄마와 같이 잠을 청해 보기도 하고, 우리와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안도의 말을 수없이 건넸지만, 일방적인 의사소통일 뿐이었다. 일주일을 넘게 잠을 한숨도 못 주무신 탓에 망상에 빠져 "살아서 뭐 하냐, 죽고 싶다."라고 부정적인 말씀만 내뱉으시던 엄마. 그런 엄마를 울면서 말리고 회유하고 어떨 땐 큰 소리로 뭐라 하기도 하였지만 병세는 더 심각해질 뿐이었다. 이대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곧장 병원을 모시고 갔다. 외할머니처럼 치매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뇌 CT까지 찍어본 결과 다행히 그런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상실감, 우울증으로 신경이 쇠약해져 잠을 이루지 못해 망상으로 이어져 판단이 흐려진 것이었다. 엄마 혼자 생활하기는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한 사람의 극심한 외로움의 바이러스가 이토록 치명적일 수 있을까. 평소에는 매우 밝고 낙천적인 엄마였기에 '엄마는 늘 괜찮을 거야'라고 안일하게 대처한 내 무뚝뚝한 성격 탓을 아닐는지. 이도 아니면 옆에서 든든히 엄마를 위로해야 할 아빠의 역할이 부족했을는지. 그저 엄마의 건강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치 않았다는 것에 모든 가족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1월.

한 달간의 장기 입원을 하게 됐다.

그 사이에 아빠는 나에게 자주 전화를 주셨다.
"우정아, 엄마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가져다줘야 하는데 엄마가 자주 입던 옷은 뭐였니, 어디에 있니?", "자주 쓰던 화장품은 뭐니?", "내가 엄마에 대해 이렇게 아는 것이 없었구나." 하면서 흐느끼며 울던 아빠의 목소리. 아빠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뚝뚝함과 무관심을 인정하셨고, 엄마가 퇴원하고 나서도 살뜰히 엄마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병원에서도 이렇게 빨리 호전이 되는 케이스는 드물다고 하였다.

 항상 강하고 밝은 모습만 보였던 엄마가 쏘아 올린 아픔은 우리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늘 우리 가족의 안위만을 물어보던 엄마는 무려 40여 년 만에 우리 가족의 보살핌 속에 일상을 살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을 머금게 된다. 지금은 그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몸과 마음도 모두 건강해진 엄마.
전화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엄마, 어디 아픈 거 아니지?"라고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상.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상이고 작은 행복인걸. 엄마에게 받기만 해서 모르고 살았던 지난 나날들.
'엄마,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요.'라며 홀로 수없이 다짐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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