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존재 만으로도

엄마의 유서

by 오그레스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좋다.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이 나와도 나는 수고스럽게 전기 포트에 물을 담고 스위치를 켠다.

찬장 문을 열고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머그컵을 꺼낸다.

보글보글 끓는 뜨거운 물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머그컵에 따른다.

머그컵 안에 엄마와 함께 샀던 귤홍차 티백을 넣어본다.

향긋한 귤 내음이 좋다.


엄마, 이 머그컵 모양이 예쁘네요.

나는 머그컵에 있는 그림이 예쁜데?

그럼, 우리 기념으로 이 머그컵 한 개씩 살까요?

좋지.


엄마와 여행을 갔을 때 커플로 같이 샀던 머그컵이다. 나는 머그컵을 좋아하고 엄마는 머그컵에 있는 그림을 좋아하셨다. 머그컵을 보면 그때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다.

엄마가 밝게 웃던 얼굴도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쇼핑을 가도 예쁘다고 말만 하시고 그 물건을 사지 않으셨다. 내가 예쁘면 사자고 제안을 해도 엄마는 아니라며 예쁘기는 한데 필요는 없다면서 필사코 거절하시고 구매하시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가 나와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엄마가 고르고 결정했던 물건이었다.

엄마는 그 머그컵을 유품으로 남기셨다. 쓰지도 않으시고 포장도 그대로였던 그 머그컵을 나에게 다시 선물로 주셨다.


머그컵이 담긴 종이백에는 아빠와 나 그리고 엄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젊었을 때 아빠와 연애 시절에 아빠가 찍어줬다는 엄마 독사진, 그리고 엄마 혼자 사진관에서 찍은 영정사진이 들어있었다.


엄마는 서툰 글씨로 편지도 남기셨다.


나는 신랑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살아온 40년이란 세월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쉽고 후회가 많이 된다.

조금 있으면 내가 다시 나를 잊어버리고 내가 나를 버린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로 돌아왔을 때, 내가 나를 붙잡고 있을 때 조금씩 써 내려간다.

나를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내 딸에게 편지를 남기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내 딸아,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제일 아쉬웠던 거는 내가 나를 사랑해주지 못하고,

돌봐주지도 보호해주지도 못했던 것이 제일 서럽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나는 나를 제일 많이 사랑하고 아껴줄 것이다.

바쁜 와중에도 나를 걱정해 주고 돌봐준 나의 유일한 가족 내 딸에게 고마웠다고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죽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딸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지만 내가 언제 변할지 몰라서 기록을 남긴다.

내가 낳고 길러서 내가 너의 엄마라서 미안하고 미안하다.

더 좋은 엄마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해 본다.

너는 너 자신을 많이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만나 너무 행복했고,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모두 소중하고 좋았다.

앞으로 더 길게 살면서 너의 아이도 보는 것이 내 소원이었건만, 그건 나에게 너무 큰 욕심인가 보다.

사랑한다 내 딸, 건강하고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많이 미안하다.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미안하다 내 딸.


울고 싶지 않다. 눈에서 한 없이 눈물이 흐른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다.

어디 갔냐고 묻고 찾아가고 싶다.

엄마라는 존재만으로 나에게 힘이 돼주셨는데...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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