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 -그때의 기록 02
"북한이 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뉴스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불꽃을 내며 발사되는 미사일의 모습이 화면을 메운다.
그걸 보는 마음이 예전과는 다르다.
'군인들 휴가는 김정은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김정은 때문에 휴가가 취소되고 계획이 틀어졌다.
실제로 제주도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가, 비상이 걸려 위약금을 내고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저런 뉴스를 봐도 더 이상 그때만큼 긴장하지 않는다.
민간인이 됐음을 실감한다.
1996.9.18일.
강릉 안인진리에 북한 잠수정이 침투했다는 속보로 하루가 시끄럽다.
결국 전군에 대간첩작전,
'진돗개하나'가 발령됐다.
결혼을 하고 6개월 만의 일이다.
비상근무체제 돌입했고 투입대기 중이었다.
이틀 후,
남편은 이른 출근을 했다.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에 감탄하며 이불을 털고 있을 때,
"따르릉따르릉" 군전화가 울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지휘관 관사의 군 전화가 울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증평에서 사단 기동대대 중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다.
"난데."
남편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작전명령이 떨어져 바로 출동을 나가야 해!"
"응? 어디로? 언제 오는데?"
"단양 죽령으로. 언제 들어올지 몰라.
연락이 어려울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라디오를 켰다.
여기저기 뉴스를 찾아봐도 더 이상 어떤 소식을 들을 수도 없다.
앞집, 선임 중대장 집의 문을 두드렸다.
사단 책임지역인 봉화에서 거동 수상자가 신고됐는데,
강릉에서 침투한 간첩 같아서 대대 전체가 출동을 하는 거란다.
아! 이게 군인이구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별일이야 있겠어? 괜찮을 거야!
라디오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볼륨을 높였다.
온 신경을 라디오 뉴스 소리에 집중했다.
1996.9.20. 아침.
경북 봉화에 거동수상자 출현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강릉에서 침투한 간첩이 사단책임지역에 출현한 것으로 판단,
08시경 사단기동대대에 죽령고개 차단작전 명령이 수령됐다.
명령수령 후 완전군장으로 출동준비를 완료하는데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간신히 가족에게 출동여부만을 통지한 채 탄약. 수류탄을 지급받았다.
심장이 떨려온다.
많은 훈련으로 단련됐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상황이다.
시누크헬기가 연병장에 도착했다.
헬기 4대의 프로펠러는 빠른 탑승을 재촉하듯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군복에 달려 있는 차가운 수류탄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선발대와 후발대 이백오십여 명의 대대원이 단양 대대에 집합했다.
다시 군용 트럭에 올랐다.
검게 위장한 사병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돈다.
죽령 집결지 이동후 한시가 다되어서야 전투식량으로 중식을 해결했다.
맛이 없는 건지, 입맛이 없는 건지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25kg이 넘는 완전군장을 둘러멨다. 조심스레 탄약과 수류탄을 다시 확인한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이제 죽령정상까지 이동해야 한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허벅지가 통증으로 조여왔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어느새 16시다.
3명 1개 조로 야간작전준비 시작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애물을 설치했다.
수많은 훈련으로 익숙한 상황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조명지뢰를 설치 중이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순간,
모두의 말과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시간이 멈춘듯했다.
그렇게 1분여의 시간,
하늘을 밝히는 폭죽 같은 불빛은
적에게 우리의 위치를 밝히는 위험등대였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옆 중대의 조명지뢰 설치 중 폭발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중대의 조명지뢰를 설치하던 중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감고도 설치할 수 있는 베테랑이다.
그런데 떨리는 손때문에 전선의 연결이 어렵다.
그 손 위로 장갑 낀 두 손이 겹쳐졌다. 흔들리던 눈빛을 다시 전선을 잡은 손에 집중한다.
크레모아 설치까지 마친 20시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야간작전에 돌입했다.
침묵의 시간이 계속됐다.
언제 무장공비가 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24시경.
30분 단위로 이상유무 체크를 위해 신호줄을 당기는데, 신호가 없다.
다시 한번 줄을 당겨봤다. 여전히 답이 없다.
어둠을 뚫고 인접 진지를 향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소리에 심장이 멎는 거 같다.
어렴풋이 진지가 보였다.
그런데 사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심장이 방망이질을 했다.
주변을 경계하며 몇 발짝 앞으로 나갔다.
'헉!'
안도와 함께 화가 올라왔다.
진지에 쪼그려 앉은 채로, 총을 겨눈 자세로 잠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조용히 어깨를 흔들었다.
화가 났지만 몇 마디의 정신 교육 후 작전을 이어갔다.
더 이상 혼을 낼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처음 겪어보는 이 상황이 얼마나 숨 막혔을지 너무 잘 알기에.
동이 틀 무렵,
무전이 울렸다. 대대장이다.
상황이 종료됐으니 철수하라는 명령이다. '오인신고' 란다.
허탈했다. 허무했다.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전달했다.
작은 환호 소리가 들렸다.
한 발 늦게,
그들의 안전과 무사함에 감사가 밀려왔다.
적과의 교전 없이, 피해 없이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동쪽 하늘에 여명이 시작됐다.
그 빛이 서서히 붉어지더니,
마침내 불덩이 같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죽령 정상에서 맞이한 해돋이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어깨를 펴고 온몸으로 그 빛을 받아냈다. 붉은 태양의 기운이 핏줄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것 같다.
온몸에 '쫙' 하고 소름이 돋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다음날 늦은 오후,
또다시 군전화가 울렸다.
두 번째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 무사히 복귀했어. 걱정 많이 했지?"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하!"
그제야 온전한 숨이 쉬어졌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린 그 순간은 가슴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남편은 출근할 때마다 '다녀올게.'라는 말과 함께 입맞춤을 한다.
아이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심지어 나와 다투었을 때조차도.
그만의 그 의식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